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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6_4 김동진_아일랜드에서 바라보는 한반도 평화 1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5. 9.

[시선 아일랜드에서 쓰는 평화학 이야기]


아일랜드에서 바라보는 한반도 평화 1


김동진


평화학 과정 학생들이 제출하는 에세이 가운데 각국의 사례를 비교하는 글을 자주 읽게 된다. 세계 어느 분쟁 지역에서나 갈등의 원인과 진행 과정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면에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평화연구자들은 비교 연구가 현실에 대한 편견, 잘못된 인식과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각 분쟁 지역의 평화 프로세스가 마주하는 도전 과제들에서 분명 유사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도전 과제들을 각 지역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비교해본다면 상당히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다.


평화 프로세스는 1970년대 이스라엘,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간의 평화협상 및 이행 과정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평화 및 휴전협정의 수가 증가하면서 그 사용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흔히 평화 프로세스를 평화협정에 이르기 위한 협상과정만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경우에서처럼 협정 이후 이행과 발전과정도 평화 프로세스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각 지역 평화 프로세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어려운 과제는 평화 프로세스를 유지하는 일이다. 특히 1990년대 맺어진 협정들의 상당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 조각으로 변해 버리면서, 평화 프로세스의 지속가능성은 평화연구자들의 공통 관심사가 되었다.


평화 프로세스의 협상 및 이행 발전과정과 관련한 몇 가지 이론적, 실천적 논의가 있다. 그중 주요 국제기구와 정부가 폭넓게 수용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평화이론은 국가의 취약성과 평화 프로세스의 취약성을 동일시한다. 독재국가는 국가의 힘이 너무 강해서 자기 마음대로 평화 프로세스를 무너뜨릴 수 있고, 실패국가는 국가의 힘이 너무 약해서 평화 프로세스를 유지할 힘이 없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최고의 방안은 이들 국가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강력한 비판을 받아왔다. 자유주의적 평화이론은 전지구적 위계질서와 서구 엘리트 국가의 이해를 반영하는 일방적이고 제도적인 처방일 뿐이며, 분쟁 지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따라서 많은 평화연구자들은 평화 프로세스가 결국 지역 주도의 실천에 기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대 평화 프로세스들을 비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자유주의적 평화론과 달리 보편적 만병통치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 각각의 지역 상황에 유용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는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의 종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오슬로 프로세스 등 동시대 평화 프로세스들로 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98년 성금요일 평화협정 이후에는 아일랜드의 경험을 다른 지역과 공유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주로 분단국 사례 연구, 특히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비교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이는 아마도 평화 프로세스보다는 통일 프로세스에 대한 시사점에 초점이 맞추어 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일랜드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갈라진 분단국가이다. 그런데 통일 프로세스가 아니라 평화 프로세스를 강조한다. 남북 아일랜드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과, 영국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 북아일랜드 분쟁의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통일 문제는 갈등의 심화로 이어질 수 있으니, 일단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데 집중하자는 논리이다. 물론 독일의 경우도 통일을 강조하기보다 평화를 우선시하다보니 오히려 통일에 이르게 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은 독일의 동방정책 사례를 모델로 한 북방정책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와 한반도를 비교함에 있어 가장 큰 유용성은 이미 통일을 이룬 독일과 달리,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같은 시대에 진행되고 있는 프로세스라는 점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반도와 아일랜드를 비교하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백 년 전의 일이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는 한국인을 동양의 아일랜드인이라 비유했다. 이후에도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이 한반도를 아일랜드와 비교하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식민지로서의 경험, 분단, 전쟁 등 오랜 갈등과 분쟁의 역사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 한반도와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를 비교하는 회의에 참가한 한 북아일랜드 학자는 필자에게, 분쟁의 역사 때문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도전과제의 유사성 면에서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먼저 두 평화 프로세스 모두 지정학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아일랜드의 경우 남북 관계, 신구교 관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유럽 국가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한다. 예들 들어 유럽연합의 등장은 남북통일 또는 북아일랜드의 영국 잔류라는 제로섬 게임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유럽의 경험에 비추어 동아시아 안보경제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이 여러 차례 제안된 바 있다. 그러나 영국이 브렉시트를 선언하면서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받는 부정적 영향을 지켜볼 때, 지정학적 상황의 변화는 언제라도 평화 프로세스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평화 프로세스는 반드시 지정학적 악조건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포함해야만 한다.


두 번째로 아일랜드와 한반도 모두 사회경제적 격차라는 쟁점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여론조사에서 남아일랜드 국민 약 70%가 통일을 원하지만, 조속한 통일을 원하는 이들은 20%대에 불과했다. 통일 후 북아일랜드에 들어갈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1990년대 이후 아일랜드 정부, 영국 정부, 유럽연합은 북아일랜드의 평화와 경제발전을 위한 지원을 계속해 왔다. 이를 통해 남과 북의 많은 시민단체들이 평화적 교류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평화적 교류협력은 영국의 브렉시트 이후에도 이전의 분쟁 상황으로 돌아가는 일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켜왔다. 한반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남북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통일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남북 경제협력 및 개발지원 사업은 통일의 장애물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접촉면을 증가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상호 신뢰구축과 화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한국과 북아일랜드의 평화교육을 주제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열린 국제회의 어린이어깨동무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일랜드와 한반도에서 가장 어려운 도전 과제는 전쟁 및 오랜 기간 지속된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상호 불신이다. 그간 한반도와 아일랜드의 평화 프로세스에서 평화공존, 권력공유, 협의주의, 연합, 통합, 연방 등 다양한 정치적 해결 방안이 구상 및 실행되었다. 그러나 상호불신은 합리적 해결 방안의 합의와 이행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상대 갈등집단과 협력하여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기 집단에 대한 배신자로 오해받게 되는 경험도 여전하다. 정치인들은 이런 상호불신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지 세력을 강화하려 한다.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는 한반도와 달리 현재 진행형이지만, 필자가 개별적으로 만난 아일랜드 학자들과 활동가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현재 평화 프로세스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면서, 피로감과 좌절감을 감추지 못하곤 했다.


얼마 전 어린이어깨동무가 남북 아일랜드의 여러 시민단체를 방문하고, 남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서 이곳의 평화교육 학자, 전문가들과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단체 방문 및 국제회의에서 위에 언급한 도전 과제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반도와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처한 도전 과제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험을 나누는 시간 속에서, 언제나 마무리는 희망을 지켜나가자는 서로를 향한 격려로 끝맺음 되었다. 어깨동무의 방문을 통해 이곳의 평화단체들도 다시 한 번 힘을 얻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았다.


이 과정 속에서 필자는 동시대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비교가 서로의 상황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을 넘어, 함께 희망을 되살리고 연대의식을 발생시키는 실천적 평화활동일 수 있다는 점을 느꼈다. 평화 프로세스를 형성, 유지, 발전시키는 힘은 역시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다. 평화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우리의 희망이 존재하는 한, 중단된 것처럼 보이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김동진 | 한신대에서 신학을, 시드니대학에서 평화학을,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국제평화학 겸임교수로 평화학을 강의하면서,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비교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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