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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_3 정경화_칸트의 영구평화론을 통해 본 한반도의 평화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4. 24.

[시선 | 평화를 이야기하는 철학자들]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통해 본 한반도의 평화


정경화


세계평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일까? 미국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위체계) 미사일 배치와 북핵실험으로 한반도에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이때에 남북한 사이의 긴장해소라는 긴급한 과제를 코앞에 두고 세계평화를 꿈꾸는 것은 너무나 낭만적인 일일까? 아마도 우리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지 않았기에 거꾸로 한반도 평화정착이 이리도 지난한지 모르는 일이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세계평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소원했던 인물 중의 하나로 그의 말년 저작들에서 전쟁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을 인류가 도달해야할 역사적 목적지로 지목하고 있다. 칸트는영구평화론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세계평화를 기획하는데, 단지 국가 간 전쟁이 멈춰진 일시적 평화가 아닌 전쟁발발의 가능성이 영원히 차단된 영구적인 평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영구평화론은 기본적으로 법률 조항이 나열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여섯 개의 예비조항이 제시된 후, 세 개의 확정조항이 핵심조항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어서 영구평화의 보증과 비밀 조항에 관한 두 개의 추가 조항 그리고 도덕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한 두 개의 부록도 같이 실려 있다.

 

예비 조항

1.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암암리에 포함한 채 맺은 어떠한 평화 조약도 유효하지 않다.

2. 어떠한 독립국가도, 작던 크던지 간에, 상속, 교환, 매매 혹은 증여에 의해 다른 국가의 지배하에 놓일 수 없다.

3. 상비군은 조만간 완전히 폐지되어야한다.

4. 국가 간 대외분쟁과 관련한 어떠한 국채도 발행되어서는 안 된다.

5.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강제적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6. 다른 나라와의 전쟁 동안 장래의 평화 시기에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에서의 반역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

 

확정 조항

- 1의 확정 조항: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정이어야 한다. (공화제 국가)

- 2의 확정 조항: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 체제에 기초한 국제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국제연방법)

- 3의 확정 조항: 세계시민법은 보편적 우호 조건에 의해 제한되어야한다. (세계시민권)

 

먼저 예비조항의 내용을 크게 세 가지 요점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우선 모든 국가가 다른 국가의 간섭, 지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모든 국가의 완전한 독립 상태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령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전후 평화적 관계 회복을 위하여 전쟁 중 서로에게 적대적인 감정이 쌓이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전쟁을 대비한 상비군 유지를 포기하는 것, 즉 모든 국가가 전쟁발발의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않는 것이 세계평화를 이루는 길인 것이다사실, 예비조항이 모든 국가에 의해 준수된다면 이미 세계평화가 충분히 성취될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에 군대가 없어진 상태, 서로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지 않고, 주권 침해의 의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칸트는 공화제 국가’, ‘국제연방법’, ‘세계시민권을 확정조항으로 둔 것일까?


예비조항이 적대적 관계 형성이나 전쟁과 같은 비평화적 상황이 생기는 것을 직접적으로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확정조항은 공화정과 국제연방이라는 법에 기초한 정치체제 속에서만 비로소 평화가 성취되었다 흔들렸다 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나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법적 기초 위에 형성된 영구평화는 모든 사람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같은 지구인으로서 환대 받을 권리인 세계시민권의 형태로 압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세 가지 확정조항 중에서도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제1의 확정조항으로 모든 국가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영구적 세계평화의 기초 중에서도 기초라고 볼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공화정이란 전제적 정치체제에 반대되는 것으로 모든 구성원이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하나의 공통된 법률 아래에서 주체가 되어, 시민으로서 법적 평등을 보장받는 사회이다. 칸트는 입법과 행정의 분리를 공화정의 특징으로 꼽고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삼권분립을 통해 권력자들이 시민의 자유와 평등에 반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을 막는 민주적인 입헌정치체제가 공화정인 것이다.


칸트는 공화정이라는 체제에서는 영구적인 세계평화의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다고 본다. 공화정에서 통치자가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직접 몸 바쳐 싸워야하고,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부담하게 되며, 한 번 일어나면 이후 계속적으로 반복될 위협에 시달리게 되는 대재앙이 곧 전쟁이라는 것을 아는 시민은 전쟁선포에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전쟁을 통한 갈등 해결을 포기한 공화정은 대신 세계 연방을 결성하여 국제법의 적용 아래에서 각 국가의 권익을 보장받는 평화로운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연방국가체제에서 개인은 다른 나라의 영토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세계시민으로서 적대시되지 않을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칸트의 영구적 평화의 구상 한 가운데에는 공화정이 있다. 세계평화는 모든 국가가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공화국이 되는 것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통치자들이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하고 모두 한통속이 되어 국민을 기만하고 불법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부정부패의 국가, 법치의 근간을 무너뜨려 국가의 주인을 국가로부터 소외시키는 전제국가가 세계적으로 주종을 이루는 한, 전쟁의 영원한 종식이라는 인류사적 목적은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현재 한반도의 상황에 던지는 메시지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공화국 사이의 평화정착이 칸트가 기획한 영구적 세계평화 추구의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예비조항에서 강조되었듯이 서로를 간섭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긴장감을 조성하거나 적대적 감정을 자극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군비축소 등을 통해 전쟁의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남과 북 모두 평화를 원하는 시민의 뜻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는 공화국, 국가다운 국가가 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정부 들어 북한 붕괴를 가정하고, 긴장감을 높이는 사드 미사일 배치를 강행하고, 북한 인민을 선동하는 듯 한 발언을 국가원수가 직접 하는 일들을 보면, 우리 정부가 거의 모든 예비조항에 반하는 행동을 일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전쟁의 불씨에 부채질하고 있는 격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문제 상황에 놓인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칸트가 말하는 공화국의 면모를 거의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과 북 모두 우선은 제대로 된 공화국을 건설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평화구축의 기반을 다지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이루어 세계평화에 이바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경화 | 대학에서 때때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세상에 정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녹록하지 않아 늘 궁시렁대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 만드는데 일조하고픈 소망은 꼭 쥐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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