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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5_2 정영철_남과 북은 그저 '좋은 이웃'이어야 할까?

by 어린이어깨동무 2021. 3. 12.

[한반도 평화교육] 

남과 북은 그저 '좋은 이웃'이어야 할까?

정영철(서강대학교 교수·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소장)

 

지난 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은 6.25 전쟁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우리나라의 체제를 북한에 강요 할 생각은 없다”, “통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친한 이웃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체제 통합 혹은 흡수 통합을 부정하고, 남과 북의 공존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구절로서 ‘친한 이웃’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처럼, 최근 남과 북의 관계를 ‘이웃’ 특히, ‘좋은 이웃’으로 하자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전에 조정훈 의원이 대표로 있는 <시대전환>이 공식적으로 이 주장을 당헌,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시대전환>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강령을 보면, “우리는 북한을 무조건 적대시하는 관점과 낭만적 민족주의 모두를 넘어서며, 성급한 통일을 준비하기보다는 북한을 이웃 국가로 대하며 장기적인 차원에서 통합을 지향한다”로 나와 있다. 역시 홈페이지에서 <시대전환>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을 공존하는 이웃으로 대하는 냉철한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현재의 남북관계의 적대적이고, 불안한 한반도 평화를 항구적인 평화적 관계로 바꾸고자하는 하는 염원과 의지가 배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통일 이전에 남과 북의 관계를 ‘좋은 이웃’ 즉, 서로 싸우지 않고, 도우면서 공존하고 번영하는 관계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남북 관계를 ‘좋은 이웃’으로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남북이 싸우지 않고, 상부상조하면서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관계를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최근의 여론조사의 추이를 살펴보면, 과거 남북의 통일 이유를 ‘같은 민족’에서 찾던 답이 확연히 줄어들고,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역시 ‘좋은 이웃’을 주장하는 <시대전환>의 진단처럼, 더 이상 ‘낭만적인 민족주의’로 남북 문제, 통일 문제를 설득하기 어려워진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좋은 이웃’이라는 남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배경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남북을 ‘좋은 이웃’ 국가로 보는 관점(이하 ‘좋은 이웃 국가론’) 대해서는 선뜻 찬성하기 어렵다. 그 뜻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좋은 이웃 국가론’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의 우려스러움 때문이다. 사실, ‘좋은 이웃 국가론’은 아직까지 이론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도 못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지도 않고 있다. 그래서 이를 전면적으로 해부하고, 분석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지 ‘좋은 이웃 국가론’에서 풍겨오는 우려스움만을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남북의 관계와 그 해결의 대안으로서 ‘좋은 이웃’이라는 관계 설정의 모호함이다. 도대체 남과 북을 국가대 국가로서 서로 인접한 국가로 볼 것인지, 아니면 특수한 관계의 민족 내부 관계로서 ‘이웃한 특수한 존재’로 볼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미 남북은 국제법적으로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지만, 동시에 민족의 내부 관계로서의 특수한 관계로 규정하고 있고, 이는 남북이 상호 합의한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서 ‘좋은 이웃 국가론’은 남과 북을 어떻게 규정하고, 관계 맺기를 할 것인지에 어떤 대답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당면한 현실의 평화적 관계에 대한 희망을 ‘좋은’이라는 긍정적 관계와 ‘이웃’이라는 인접한 존재의 합성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둘째, 남과 북이 당면해서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동의한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도 동의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평화,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현재 동북아시아의 평화까지도 적극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비록 지금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지만, 지난 2018년의 세기적 변화의 한 복판에는 이러한 의지와 염원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좋은 이웃 국가론에서도 마땅히 한반도 및 그를 넘어선 동북아시아의 평화까지도 염두에 두는 남북의 관계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단지 남과 북의 ‘관계’만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셋째,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이웃’은 충분히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의 궁극적인 목표 혹은 한반도의 근원적인 평화의 가능성과 ‘통일’에 대한 변증법적인 사고는 ‘좋은 이웃 국가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좋은 이웃 국가론’은 당면의 평화 –좋은 이웃으로서– 그리고 장기적인 통합이라는 평화와 통일의 분리 혹은 평화와 통일의 구조적 관계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우리로서는 ‘좋은 이웃’ 국가라는 특정한 주제를 중심에 놓고 남북을 생각하기 보다는 근원적인 남북관계의 문제를 심도있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미 1990년대 이래로, 통일의 문제와 평화의 문제가 따로따로 사고되기 시작했으며, 2018년의 ‘평창 아이스하키 여자 단일팀 구성’의 논란에서 보듯이 세대에 따른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도 경험했다. 이를 반영하듯, 남북의 문제를 ‘통일’의 지평에서가 아니라 ‘탈분단’의 지평에서 제기하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고, 남북을 독자적인 국가간의 관계로 사고하는 경향도 짙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남북의 문제가 ‘민족의 문제’를 벗어난 적도 없으며, 더더구나 통일의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치환할 수는 없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시대적 조건에 맞는 통일의 방법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그 근원의 문제가 바뀌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 반영을 이유로 ‘설득의 방법’을 근본 문제로 대치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평화와 통일의 문제를 더욱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즉, 갈수록 커지는 보편주의적 가치와 요구,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는 한반도의 특수한 가치와 요구를 어떻게 결합시키고, 세대를 넘어 폭넓은 ‘설득의 방법’을 마련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남북은 엄연한 주권국가로서의 실체이며, 동시에 특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동서독 통일의 기초를 놓았던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설계자인 에곤 바가 “동독은 완전한 국가로서 국제법적으로 승인받게 될 것이다. 두 독일은 서로를 위하여 외국이 아닌한 국가의 일부라는 특수한 관계로 남아야 한다”고 했던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이후, 동서독은 평화와 공존의 길을 걸었고, 이길이 곧 통일의 길이 되었다. 평화와 통일이 결코 다르지 않은 하나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남과 북의 관계를 다시 고민하면서, 되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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