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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5_4 박지연_미안해요, 리키

by 어린이어깨동무 2021. 3. 12.

[평화를 담은 영화] 

미안해요, 리키

박지연

 

피스레터의 귀한 지면을 내어주셨을 때, 첫 영화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도 잠시, 우리 사회와 역사에 치열한 실천적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켄 로치 감독은 2014년 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마음먹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그의 이력이 이제 충분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다시 현장으로 복귀시킨 건 다름 아닌 택배노동자의 현실이었다. 아니, 그는 훨씬 이전에도 은퇴를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보수당이 집권하면서 복지정책을 축소하겠다고 발표하자 그는 반발하며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시민,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의 존엄한 삶을 그리며 영화계로 돌아왔었다. 영화로 세상과 맞서는 당신의 필모그래피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마지막 작품이 되려나 싶었던 감독이 또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찾은 푸드뱅크에서 급여를 받는 임금노동자들도 식료품을 얻기 위해 긴 줄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고용이 안정되었다고 믿는 계층에서조차 생존의 나락으로 밀리는 것을 목격한 감독은 이제 그 긱 이코노미*의 정점에 있는 플랫폼 노동, 택배노동자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불러온 새로운 형태의 노동 착취와 이것이 한 가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미안해요, 리키>를 완성한 켄 로치 감독은 주인공 ‘리키’의 플랫폼 노동을 "현대적 기술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라며 "기술은 새롭지만, 착취는 인류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긱 이코노미 : 빠른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정규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되는 경제 현상.  1920년대 미국에서 재즈 공연의 인기가 높아지자 즉흥적으로 단기적인 공연팀(gig)들이 생겨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퉁퉁 부어 떠지지도 않는 눈을 하고 택배차를 몰고 나가는 한 남자 앞에 가족들이 차를 가로 막는다. 이런 얼굴이라도, 물건조차 들 수 없는 팔다리라도 일을 나가야만 한다. 벼랑 끝에 내몰린 한 택배노동자 <미안해요, 리키>의 마지막 장면이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건실한 남편인 리키는 좀 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 화물차를 지입하고 택배 프랜차이즈의 개인사업자가 된다. 노동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번만큼 가져갈 수 있다는 건 달콤한 함정이다. 탄력 노동제라는 유연함과 자신이 자영업자가 된다는 기대감에 계약을 맺고 하루에 차량 사용비 65파운드를 아끼기 위해 아내의 차까지 팔아서 밴을 구입했다. 회사가 정규직 노동자를 채용하는 대신 제반 비용을 줄이고 언제든 해고가 가능한 비정규직, 임시직, 혹은 개인 사업자와 계약하는 방식이다. 사실상 고용상태이지만 동시에 개인사업자라는 명분으로 개인정보단말기 비용뿐만 아니라 배달 중 일어난 사고나 손실도 개인이 책임을 져야한다. 심지어 업무와 관련된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한 채 벌점제도로 압박을 받는다. 단말기 아래 분초, 일초로 나누어 뛰어야만 하고, 자신이 쉬는 날엔 대리기사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 택배를 분류하는 일 또한 택배기사의 몫으로 온전히 돌아왔다. 하루 14시간, 주 6일 하루에 200개가 넘는 택배일은 탄력 노동이라는 이름을 쓴 살인 노동이 되었다. 2분만 지체되어도 단말기의 경보음이 울리고, 화장실갈 시간조차 없어 페트병에 오줌을 눈다. 이것이 비단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영국에만 불어 닥친 임시직 노동 현장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뉴스를 통해 늘 이야기 듣던 익숙한 우리나라 택배노동자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한 쿠팡 배달 노동자는 “이 면접 장면을 보는 순간 영화에서 벌어질 일들을 예견했어요.”라고 말한다. 플랫폼 노동자의 생성과 편입과정, 노동 현장이 거기와 여기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과로사로 숨지기 하루 전, 420개의 택배 일을 하고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가면서 이제 한숨도 못자고 다시 나와야하는데. 이렇게는 더 이상 못 견딘다”고 말하던 어떤 택배노동자의 마지막 문자가 이 영화의 장면들과 겹치며 기시감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나라 플랫폼 노동자들의 월 평균 수입은 313만원이지만 이것저것 제반 비용을 제하면 순 수입은 165만원이다. 하루 평균 14시간 가까이 일하고 주 6일 일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분류 작업은 노동시간에 포함되지도 못한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수많은 ‘리키’이다. 비단 유럽에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로 악화되고 있는 모든 자본주의 구조로 확대되고 있음이다.

켄 로치 감독은 불안정한 노동 환경이 한 가정, 한 개인을 어떻게 집어삼키는지에 대한 포착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예의, 사회에 대한 성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진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적자생존의 아귀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리키는 불안과 초조의 상태가 일상이 되자 사춘기 아들과도 반목하게 된다. 한 가족이 경제적 문제로 몰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아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의 길은 좁게, 방황의 길은 넓게 만들었다. 아내의 차를 팔아 시작한 일자리는 그 희생이 보답으로 돌아오기 보다는 오히려 아내의 노동 강화로 이어진다. 뉴캐슬 지역을 버스를 타고 노인요양 가정방문을 하고, 가사노동과 자녀 돌봄까지 독차지하게 되는 아내도 일상이 버겁다. 잠자리에 누워 리키가 말한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아내 에바는 작은 소리로 답한다. “우리가 애를 쓸수록 더 커다란 구덩이로 빨려드는 거 같아” 

시대의 현실성을 담아온 감독은 늘 비전문배우와 호흡을 맞춘다. 숙련되고 세련되게 ‘연기’를 하는 배우보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사람이 필요해서이다. 리키역을 맡은 크리스 히친 또한 평생 배관공으로 일 해온 임시직 노동자이다.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온전한 이야기를 전하는 켄 로치 감독에게 붙혀진 별명은 블루칼라의 시인이다. 1977년엔 대영제국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대영제국’이 착취와 정복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날카롭게 사회를 비판했지만 때론 유머와 따스함을 함께 보여줬던 전작들에 비해 <미안해요, 리키>를 보는 내내 마음은 암울하고 먹먹하기만 하다. 켄 로치 감독의 비관은 이 시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일지도 모른다. 보편 복지가 사라지고, 플랫폼 노동자가 어느 때보다 상승한 코로나19 시대의 슬픈 자화상일수도 있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쩌면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외쳐야 한다."고 말하는 켄 로치가 있다면, 그의 영화를 보고 마음의 한 켠에 전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면, 그 대답은 “예. 그렇습니다.”이다. 이 영화의 원제목, Sorry, We missed you 은 직접 택배를 전달하지 못했을 때 택배기사가 문 앞에 부쳐놓는 의례적인 포스트잇의 문구이다. 지금은 우리가 리키에게, 세상의 모든 택배노동자에게도 똑같은 말을 한다. “미안해요. 당신을 놓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많은 리키들.” 놓치지 않기 위해,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연대의 손을 내밀 때다.

박지연 | 영화평론가, 부산어린이어깨동무 운영위원이며 부산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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