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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7_5 김소울_자유를 향한 물결-프랑스 혁명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6. 19.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자유를 향한 물결-프랑스 혁명


김소울


1682년 완성된 루이 14세의 걸작 베르사이유 궁은 보석으로 치장한 왕족들이 가득 차 있었다. 100년간 궁전은 흔들림 없는 전제군주정치의 터전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의 유대관계를 위해 정략혼인을 맺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궁전 안에서는 귀족들이 몇 날 며칠 축제를 벌이고 있었지만, 이는 궁궐 밖의 시민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페스트와 같은 질병들이 줄어들게 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점차 굶주리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기에 민중사회에서는 불안과 긴장감이 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엘리자베스 비제르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 (1783)     


엘리자베스 비제르브룅(Élisabeth-Louise Vigée)은 로코코 미술의 대표적인 궁정화가였으며, 비제르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속화가이기도 했다. 로코코 미술이란 1715년 파라오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이룬 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의 사망부터 시작하여 1789년 프랑스 혁명까지 지속되었던 미술양식으로, 화려하고 섬세하며 여성스러운 화풍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바로 이전의 바로크 미술이 왕실을 위한 그림이었다면, 로코코 미술은 귀족과 부르주아를 위한 예술로서, 루이 14세 사망 이후 억눌렸던 귀족의 향락 욕구와 사치, 화려함이 미술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화가들은 주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사랑과 문란한 사생활 등 역시 주요 주제가 된다.


그러나 로코코 미술은 이전의 영국혁명이나 미국혁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의 혁명이었던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그 화려한 막을 내리게 된다. 인구의 2%밖에 안되는 성직자, 귀족계급은 부와 권력은 누렸지만 면세혜택을 누렸고, 인구의 98%를 차지하던 시민계급이 모든 세금의 책임을 져야했던 모순적인 제도, 이성과 과학이 발전하며 혁신의 물결을 가져온 계몽주의 사상, 그리고 심각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신대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던 것은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성직자, 귀족, 시민대표로 이루어진 삼부회에서 재정난 극복을 위해 시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조세법을 제안하였고, 그 대가로 참정권을 요구한 시민대표의 의견이 묵살당하자, 프랑스 시민들은 봉기하게 된다. 시민들은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회의장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회의장은 굳게 잠겨있었고, 그 대안으로 테니스코트에 모여 국왕의 의견에 반대하며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789년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코트의 서약』 (1791)


프랑스 혁명과 함께 귀족들의 향락미술이었던 로코코 미술은 끝이 나고, 고전적 이상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미술이 꽃피게 된다.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이면서도 그 중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프랑스의 역사상 가장 폭풍과도 같았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 자크 루이 다비드『마라의 죽음』 (1793)


이 작품은 당시 급진적 성향의 혁명가였던 장 폴 마라(Jean-Paul Marat)1793713일 암살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급진파인 쟈코뱅당의 리더였던 마라는 반대파인 지로드당의 지지자로부터 암살 당하게 되고, 다비드는 이를 그림으로 기록한다. 작품 속 마라는 신성한 혁명의 순교자로서 따듯하고 노란 빛, 흰색 터번을 이용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마라의 죽음은 어려운 시민들에게 자비를 베풀던 혁명당원 마라를 다시 민중에서 살아있게 하려는 의도와, 종교의 신성한 측면을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에 옮겨 오려는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의 노력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4)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에 호라티우스의 맹세라는 유명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로마 건국사의 비극을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이 알바의 큐라티우스 가문과의 전쟁을 위해 나라의 대표로 참전하기 전 아버지 앞에서 결의를 다지는 장면이다. 오른쪽에는 누이, 아내, 어머니, 그리고 호라티우스로 시집온 큐라티우스가의 딸인 사비나, 호라티우스가의 딸이자 큐라티우스의 약혼자인 카밀라가 슬픔에 젖어있다. 이 작품은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시 왕정의 타락을 인식시키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에 대한 불씨를 제공하였으며, 이는 4년 후 발생하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루이 16세였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아이캣 미술치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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