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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8_4 김소울_낭만주의 평화와 반전의 기록자: 들라크루아

by 어린이어깨동무 2017. 8. 1.

[시선 | 평화를 그리는 화가들]


낭만주의 평화와 반전의 기록자: 들라크루아 


김소울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이 그림은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역사서에서 프랑스 혁명과 함께 자주 등장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림 한 가운데에 민중을 이끄는 여인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사용된 이후 사용을 금지 당했다가 1830년 다시 혁명을 위해 사용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1814년 왕정 복고로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샤를르 10세는 입헌군주제를 반대하며 과거의 정치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1830727, 시민들은 또다시 봉기했고 29일만에 샤를르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림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왼쪽에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는 부르주아 남성, 오른쪽에는 하층 계급의 소년, 그리고 맨 왼쪽에 셔츠를 풀어헤친 젊은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 혁명이 전반적인 사회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빅토르 위고는 하층소년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 <레미제라블>에 이 소년을 구두닦이로 등장시켰다. 또한 들라크루아는 이들의 발 밑에 쓰러져 있는 시민군과 정부군의 시체들을 통해 혁명의 기간 동안 일어났던 희생에 대한 애도를 표하였다. 그림 속 모자와 총을 든 인물은 들라크루아 자신을 모델로 그린 인물인데, 그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에는 화가도 붓을 던지고 총을 잡는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그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싸우지 못했다. 하지만 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것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붓으로 나타낸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의 상징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미술역사상 자유를 쟁취하고 해방을 꿈꾸는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1824)

 

다음 그림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보다 앞서 들라크루아가 제작한 <키오스 섬의 학살>이다. 이 작품은 1822년 그리스독립전쟁 도중 터키인들이 키오스섬의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던 사건을 주제로 제작한 작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2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7만명이 넘는 이들이 노예로 끌려가게 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키오스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당한 사람들의 모습은, 단지 키오스섬의 학살사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역사 속에 있어왔던 무수히 많은 학살 사건들을 나타내는 그림이기도 하다. 섬의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며, 민가를 모두 불태웠던 끔찍했던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들라크루아는 키오스섬의 학살 사건에 대한 분노와 경계심을 담아 국제사회에 그리스의 구원을 호소하겠다는 신념으로 이 작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1830년 그리스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키오스는 여전히 터키의 영토였으며 1912년 비로소 그리스에 귀속이 되었다.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끔찍한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들라크루아의 염원이 이 그림과 함께 역사 속에서 오래 살아 숨쉬기를 바란다


김소울 |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의 심리상담학과 특임교수로 재직중이며, <아이마음을 보는 아이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현재 미술 작가이자 아이캣 미술치료연구소 대표로서, 치유적 활동과 미술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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