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떠올림, 먹먹, 울컥, 다짐
- 프라하와 아우슈비츠 방문기-
정지영
충청남도 교육청에서 2024년 5월 31일부터 6월 8일까지 실시한 ‘역사·평화통일·민주시민교육 국외 체험 연수’에 참가하여, 체코, 폴란드, 독일을 잇는 2,000여 Km의 길을 다녀왔다. 학생과 교사 20여 명이 체코의 바츨라프 광장,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 독일의 베를린 장벽, 슈타지 박물관, 연방독재청산재단, 그리고 국제범죄재판소 등을 다녀왔다. 학기 중에 떠난 국외 체험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려 했지만, 연수 자체가 역사교훈 여행이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통해 전쟁의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기리기 위한 다짐을 담아 주요 장소를 기록으로 남긴다.
체코의 드넓은 평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비행기는 우회 경로로 예전보다 2시간 더 날아 유럽에 도착했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프라하는 광활한 평원으로 펼쳐져 있었다. 단장님은 아름다운 평원을 보시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지형에서 기동성 있는 전차가 전쟁의 양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체코 땅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전쟁을 떠올리며 여정을 시작한 셈이었다. 보석 같은 체코 프라하는 1941년부터 약 4년간 독일의 점령 아래에 있었으나, 전쟁 이후 시민들의 노력과 국제 사회의 지원으로 지금의 세계적 관광지로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고풍스럽게 보이는 동유럽의 이국적 풍경 속에서도, 전쟁영화에서 보았던 거리의 파괴 장면이 가물거렸다.
프라하 유대인의 거리에 있는 카프카
카를교와 천문시계가 있는 구시가지를 돌아보기 위해 카프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유대인의 거리를 지나쳤다. 프라하에서는 카프카 생가, 박물관, 동상 등으로 그의 문학적 유산과 삶을 기억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프라하에는 체코인의 수가 급격히 늘었고, 독일계 인구는 상대적으로 줄고 있었지만, 정치와 경제에서는 여전히 독일계가 주류였다. 또한 프라하를 ‘슬라브인의 도시’로 선언한 시장이 등장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카프카는 체코(언어), 독일(국적), 유대(혈통)의 문화가 서로 충돌하는 복잡한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카프카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1924년에 사망하여 유럽에서 벌어진 학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두 여동생 엘리와 발리는 유대인 집단 거주지였던 게토와 강제 수용소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목숨을 잃었다. 갈등과 대립의 역사 속에서 문화적, 정치적 충돌을 겪으며 경계인을 고민했던 카프카와 나치에 학살당한 누이의 이야기는 문학과 역사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었음을 반성하고 진정한 ‘떠올림(기억)’을 생각하게 했다.
프라하 궁전
둘째 날, 비 내리는 프라하에서 궁전 탐방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현재 체코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는 프라하 궁전 내부에 위치한 성 비투스 대성당은 사암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풍화되어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던 중, 갑자기 차 한 대가 들어왔다. 한 여성분이 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체코 대통령 부인이었다. 너무나 생경한 장면이라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지지자들과 격의 없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순간,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인가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대통령 부인이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 이 구절과 닮아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사전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이 제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존 레논 벽(Lennon Wall)
존 레논 벽은 1980년대 체코슬로바키아가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던 시절, 정권에 저항하던 시위대가 성당 벽에 존 레논의 초상화와 평화의 노래 가사를 그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권의 비밀 경찰이 페인트로 덧칠하며 메시지를 지우려 했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메시지를 남겼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존 레논 벽은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기후 변화'와 같은 현대 문제에 대한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더해지고 있다. 존 레논 벽은 단순한 관람용 예술 공간을 넘어, 본래의 의미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깊은 의미를 전달하는 살아 있는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바츨라프 광장과 얀 팔라흐 추모비
카를교를 건너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천문 시계를 보고, 우리는 바츨라프 광장에 도착했다. 1968년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상징인 곳이다. 바츨라프 광장은 그때 시민들의 주요 집회 장소였으며, 대학생 얀 팔라흐가 소련의 침략에 저항하며 분신을 시도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얀 팔라흐는 치료 중에 “내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소련의 침략에 항거하겠다는 이유보다는, 소련의 침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대다수가 보여준 도덕성의 상실에 항거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이란 말을 남긴다. 그의 절박한 항의가 담긴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우리가 얀 팔라흐 기념비에 도착했을 때도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광장에서는 침묵으로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평화 관련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 덕분에 얀 팔라흐의 희생이 더욱 깊이 다가왔다.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는 낮은 돌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바닥에 새겨진 십자가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불과 10미터 거리에 체코의 역사적 인물인 성 바츨라프의 동상이 웅장하게 서 있었는데, 이 두 기념물은 대조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겸손과 희생을 기리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과시적인 기념물 대신, 자유와 저항의 의미를 내면적으로 되새기고, 낮은 곳에서 묵묵히 희생과 헌신을 떠올리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다.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
프라하에서 체코의 브르노까지 4시간, 브르노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까지 다시 4시간, 회색 하늘 아래 흐린 날씨 속에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아우슈비츠 '절멸(아주 없애버림)'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비가 추적거리는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전역에는 크고 작은 수용소가 2만여 개나 있었으며, 6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집시,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집단적 광기에 휩싸인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목숨을 잃고 연기가 된 것인데, 이곳에서만 백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은 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위한 ‘최종 해결’을 추진하며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를 세웠다. 이곳은 죽음의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가 함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우슈비츠로 알고 있는 곳은 노동 수용소이며,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진 곳은 비르케나우 수용소였다.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봐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을 폴란드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된 나는, 역사적 진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치부하고 망각하고 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독일의 점령지와 동맹국에서 기차로 압송된 사람들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역에 도착한 후, 겉으로 드러난 노동 가능성에 따라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분산되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사람들은 노동할 수 있는 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비르케나우에서는 나치가 힘없는 사람들을 '목욕탕'이라고 속여 가스실로 들여보냈다. 희생자들은 비누를 손에 꼭 쥔 채 치클론B 가스를 흡입하며 약 10분간의 고통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뼈저리게 아프도록 묘사하고 있다.
드디어 장교와 마주보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장교는 군복이 꽤 잘 어울리는 마른 체격의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 말쑥함에 대비되어 오랜 여행에 지친 우리의 몰골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친 채 무심하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른손을 들고 집게손가락으로 아주 느리게 오른쪽 혹은 왼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중에 손가락으로 왼쪽 혹은 오른쪽(대게는 왼쪽이지만)을 가리키는 이 행동의 이면에 어떤 무서운 의미가 깔려 있는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빅터 프랭클,『죽음의 수용소에서』중 -
아무런 잘못도 없이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한다는 나치의 거짓말에 속아 수용소에 도착한 사람들은, 독일 장교의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이 갈렸다.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독일군이 소련군의 진입 전에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살인 시설을 거의 파괴했지만, 아우슈비츠는 정치범 수용소이자 행정 중심지였던 탓에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는 당시 사용된 가스실과 화장터가 여전히 남아 있어 역사의 참혹함을 처절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일정상의 이유로 비르케나우 수용소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방문할 죽음의 수용소를 떠올리며, 잠시 묵념을 올렸다.
수용소를 관람하려면 입장권을 확인하고 이어폰을 받은 뒤, 쇠철문을 통과해야 했다. 육중한 쇠철문이 열리면 어두운 지하 터널이 이어졌고, 그 터널을 지나 다시 지상으로 나오게 되는 구조였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느껴지는 먹먹함은 더욱 깊어졌다. 수용소의 정문이 눈에 들어오자, 이중으로 설치된 삭막한 전기 고압선 철책이 보였다. 당시 수용된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의미하는 '철책에 뛰어든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전기 철책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일을 할 수 있는 한 살 수 있다는 의미의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는 문구를 되새기며 수용소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안내판에는 노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입구에서 아침과 저녁마다 음악이 울려 퍼졌다고 적혀 있었다. 지친 몸으로 아침저녁에 강제적으로 듣던 음악이 나치의 기만적인 마취제였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누군가 탈출하면, 나치는 무작위로 10명을 뽑아 굶겨 죽이는 잔혹한 처벌했다고 한다. 어느 탈출 사건 후, 죽음의 위기에 처한 한 사람이 처자식이 있다며 살려달라고 간절히 호소했을 때,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이 자청하여 그를 대신해 처형당했다. 나치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지하 감옥과 교수대를 지나며, 그 이야기 속 깊은 희생과 잔혹함에 마음이 저려왔다. 연달아 있는 막사의 전시관 입구에는 백발의 랍비가 서 있었고, 막사 내부는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유대인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신발, 옷, 가방, 트렁크, 안경, 주방 도구, 의족, 그리고 치클론B 가스통 등이 있었다. 심지어 희생자들의 머리카락까지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30년 전 이곳을 처음 방문했다는 여행길잡이님은 그 당시에는 유리 칸막이 없이 전시되어 있어, 냄새로도 그 처참함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냄새를 맡지 못했어도, 죽어간 이들의 아픔은 오롯이 마음속에 전달되었다.
모든 유품들이 고통과 절망을 담고 있었지만, 특히 가방과 트렁크에 적힌 글씨를 보며 울컥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수일간 화장실도 없는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물건을 압수당했는데, 그들은 나중에 소지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서 가방에 이름을 적어두었다. 그들의 희망이 짓밟힌 가방이 이룬 더미를 보며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부모와 자식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부모가 아이의 신발에 새긴 이름을 보았을 때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 가져온 식기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먹먹함이 울컥함으로 변한 채 막사를 나서면서, 계단마다 좌우측으로 발 디딘 자리가 마모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1947년 수용소가 박물관으로 조성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계단이 닳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가슴에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나도 이 계단을 힘주어 밟으며 전쟁과 학살을 떠올렸고, 앞으로 평화 교육에 더욱 힘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마지막으로 치클론B 가스통이 사용된 가스실과 화장터를 나서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역사를 떠올리기 위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다양한 관람객들을 보며, 연수를 준비하면서 읽다가 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가 떠올랐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대규모 추방을 조직하고 관리한 인물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실행하기 위해 철도 시스템을 이용해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강제 이송하는 일을 주도했다. 1960년, 그는 숨어 살고 있던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압송된 후 재판을 받았고, 재판에서 그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유대인의 효율적인 수용소 이송에 협조했던 철도 회사들도 역시 나치 협력에 대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으며, 즉각적인 반성도 없었다.
그러나 통일과 민주화, 그리고 역사 청산의 1990년대 이후, 독일 사회 전반에서 나치 시절의 범죄와 그 협력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면서 철도 회사들도 점차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철도 회사들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나치 정권 아래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베를린 중앙역을 비롯한 여러 주요 철도역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시설을 설치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던 시대가 분열과 대립의 냉전시대가 아니라 반성과 용서의 용기가 존재하는 시대였다면 아이히만이 진정한 참회를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독일이 1990년대 통일 이후 과거를 청산하고, 외면했던 역사의 진실을 직시한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이 분단된 땅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깊은 반성과 기억의 시간이 오리라 굳게 믿어본다.
브로츠와프의 ‘익명의 보행자(Anonymous Passerby)’
독일로 가기 위해 잠시 들른 폴란드 브로츠와프는 작고 아담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도시였다. 이곳에는 도시 곳곳에 설치된 작은 난쟁이 동상들이 유명하다. 1980년대 '오렌지 대안 운동'(Orange Alternative Movement)을 기념하기 위해 2001년에 처음 청동 동상을 세운 이후, 지금은 300여 개로 늘어났다. 이 동상들은 저항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방법으로, '난쟁이 워킹 투어'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그 기억을 현재화하고 있었다.
브로츠와프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탄압받은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 보도에 각각 7명의 인물이 설치되어 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 유아차를 끄는 엄마, 신사, 노동자 등이 세워져 있는데, 한쪽 보도에는 이 인물들이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 반대편에서는 땅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모습이 형상화 되어 있었다. 이 동상은 1981년 반정부 인사들을 체포하며 탄압하려 했던 계엄령 시대와 그 이후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마주한 이 동상은,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우리가 역사를 교과서 속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기억하고,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이 동상이 일깨워 주고 있었다.
다음날,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을 실천해 온 독일의 '기억 문화'를 고민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향했다.
정지영 |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국어 교사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다방면에 대한 관심과 실행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선생님이 되려고 평화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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