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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6_4 박지연_‘미나리’와 아시안 헤이트

by 어린이어깨동무 2021. 5. 13.

[평화를 담은 영화] 

‘미나리’와 아시안 헤이트

박지연

영화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은 역사적 성취를 이뤄냈다. 작년부터 계속 이어온 영화제 수상 소식은 마침내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정점을 찍었다. 역시나 첫 포문을 연건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작품상을 받으면서이다. ‘선댄스 영화제’는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자신이 출연한 ‘내일을 향해 쏴라’의 배역인 ‘선댄스’의 이름을 따 만든 독립영화제이다. 독립영화제라 해도, 그 명성과 권위에 있어 미나리의 첫 수상 소식의 끝은 어쩌면 이럴 거란 기대를 품게 했다. 독립영화로서의 ‘미나리’가 거대한 영화제로 이어짐이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영화제 하나, 하나를 고개 넘듯이 수상 하였고, 골든 글로브에서 영국아카데미까지 이르렀을 땐 이제 숨을 고르며 아카데미 수상을 기다렸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데이빗이 말한다. “할머니가 할머니 같지 않아” 어린 손자에겐 쿠키도 굽지 않고, 나쁜 말을 하고, 레슬링만 보고, 예쁜 팬티도 입지 않는 할머니는 미국 할머니와 너무 다른 존재이다. ‘데이빗아’라고 손주를 부르는 이 할머니는 영어는 고사하고 평생 시장에서 장사만 해온 터라 음식 솜씨도 좋지 않다. 그래도 우리에겐 익숙한 존재이다. 쓴 한약을 먹이고, 삶은 밤을 입으로 깨물어 손주에게 먹이거나 이질적인 냄새가 나지만 그 할머니는 병약한 손자를 ‘스트롱 보이’라 응원한다. 심장이 약한 손자가 할머니를 붙잡기 위해 생애 첫 뜀박질로 달려가 두 손을 잡는 장면은 두 약자간의 연대처럼 느껴져 보는 이의 마음이 뭉클해진다. 미국관객을 위한 영어자막에도 “Grandma” 대신 “Harmony”라고 쓰는 이 비(非)미국적 할머니의 존재는 확실히 한국 할머니의 전형에 가깝다. 정말 가족을 하모니하게 만드는 할머니의 역할이다. 할머니의 희생과 애정, 지난 시절 부모님들의 고생담을 미학적인 영상과 음악을 통해 우리 관객의 감성을 울렸다면 미국 관객은 무엇을 본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영화 ‘미나리’는 미국에서 먼저 관객들이 보고 인정했으니 말이다.

미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건 장르영화이고 그 장르의 시대를 연건은 서부영화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관객이 가장 쉽게 다가가고 선호하는 영화란 의미이다. 장르영화는 몇 가지 컨벤션을 내포하는데, 서부영화의 컨벤션 중 하나는 바로 개척에 관한 내러티브 구조이다. 역마차를 타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가거나, 한 곳에서 가장이 가족을 이끌고 인디언이나 대자연이라는 역경에 맞서 싸우는 내용이다. 마치 ‘미나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미나리’는 다르게 말하면 미국의 현대적 서부 영화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가족들이 처음 도착한 아칸소 허허벌판에 세워진 이동식 트레일러 주택은 서부시대의 역마차와 비슷하다. 아무도 살지 않은 땅을 개간하고, 고난을 겪고 그럼에도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며 마침내 화합하는 내용이 저변에 깔린다. 이렇게 영화 ‘미나리’는 우리 관객에는 할머니라는 어찌할 수 없는 뼛속까지 각인된 기억의 따뜻함과 위로를, 미국 관객에겐 기독교적 은유가 이야기의 밑으로 흐르면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개척과 극복, 가족 화합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인 이민사를 통해 정서적 친밀감을 높였다는 점에서 모두의 보편적 감성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이 영화가 동서양 모두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이야기하기엔 지금은 부족한 평이다. 뜻밖에 영화 '미나리'는 의외의 결과를 낳고 있다. 한 영화가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서 사회관계망 속에서 어떤 지점을 점유하고 영향을 끼치는지 가장 도드라지게 잘 보여주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처럼 이탈리아 이민사를, 마틴스콜세지감독의 ‘갱스 오브 뉴욕’, ‘아이리시맨’처럼 아일랜드 이민사를 다룬 메이저의 영역에서 아시아 이민사, 그중에서도 한국인의 이민사가 미국 영화의 정면에서 다뤄지면서, 많은 이민2세대들은 비로소 아버지세대를 마주하게 된다. ‘미나리’에서 아버지 제이콥을 연기한 스티브 연 처럼 “그전까지 아버지를 볼 때 하나의 주체, 사람이 아니라 문화적 언어적 장벽이 있는 추상적 존재로 여겼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아버지를 사람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Harmony’처럼 제대로 된 영어도 하지 못하고 미국의 주류사회에 속하지도 못하는 부모세대를 애써 부정하고픈 존재가 아닌 이제 고개를 들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며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된다면 그것도 ‘미나리’의 긍정적 효과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공교롭게도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모두가 고통 받는 이 시국에 트럼프 정권은 바이러스 이름에 지역 명을 써가며 아시아 증오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지쳐가는 시민들의 분노는 ‘아시안 헤이트’로 터져 나왔다. 

애틀랜타에서 총격사건이 있었고, 아시아 여성들이 타깃이 되었다. 애틀랜타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 가수 에릭 남은 ‘뉴욕 타임즈’에 이 사건에 대해 기고한다. “많은 아시아 미국인과 태평양계 사람들에게 삶이란 불안과 트라우마, 그리고 정체성 위기가 가득한 것입니다. 백인 우월주의와 체계적 인종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 문화의 복잡한 역사는 단일민족이 아닌 다양한 집단에 의해 더욱 복잡해집니다. ‘영원한 외국인’과 소수민족 신화 모델의 연구대상으로서 아시아인들은 문화와 정치에 초대는 받았으나, 완전히 통합되지 않거나, ‘괜찮다’는 미명 아래 대부분 무시됩니다.” 그는 아시아 미국인은 여전히 배제되거나 페티시의 대상이 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살해되기도 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에릭 남도 이 불편한 지위가 자신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어떡하든지 미국인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이름조차도 미국인이 부르기 쉬운 이름을 선택하며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노력과 애를 쓴다는 건 아시아인들의 현재의 위치를 가늠하게 만드는 일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들이 늘 받는 “어디서 왔어요?” “어쩜 그렇게 영어를 잘해요?” “영어를 어디서 배웠어요?”라는 질문은 이들을 계속 이방인으로 떠돌게 한다. 에릭 남의 어머니가 운전을 하다 실수를 해도 “중국년”이라는 욕을 들었고, 심지어 어린 아들도 욕하는 미국인이 아니라 엄마가 잘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말한다. “I’m from here.” 난 여기서 왔다고. 애시당초 이곳에 존재했다고. 힘들게 이민 온 아버지 세대의 아이들이라고. 이제 사회일원으로 대접받기를 당당하게 말한다. 

헐리우드 주류 영화계에서 가장 성공한 배우인 산드라 오도 이제 순응하는 아시아인, 미국인과 닮으려는 아시아인으로 남지 않기로 했다. 산드라 오는 확성기를 들고 외친다. “나는 아시아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전 이곳에 어울려요.” 이 외침은 아시아인들의 결속과 연대를 향하고 있다. ‘미나리’가 보여준 아버지세대는 병아리 감별사를 하며 생계를 이으며 돈 몇 푼 아끼려고 스스로 우물을 파며 고생을 해도 이건 부끄럽고 감출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의 모습이고 나는 그들의 자식임을 이야기한다. ‘미나리’는 영화가 한 오락으로서의 콘텐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의제로 넘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브래드 피트가 제작하고 미국 자본에, 미국 국적의 감독이 연출한 ‘미나리’는 제작국에 소속되는 영화 산업 관례에 따라 엄연히 미국영화임에도 우리는 ‘기생충’에 이은 한국영화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혈연 마케팅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미국에서 오늘도 망치로 벽돌로 일어나는 아시안 여성을 향한 혐오범죄를 보면서 한국에도 미국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슬픈 부유를 ‘미나리’를 통해 보게 된다. 어쩌면 ‘미나리’의 미덕은 한 여배우가 한국영화사에 안겨준 큰 업적만큼이나 미국에서 사는 아시아인의 이야기를 소환하고 확대한 것이며, 이것은 우리 땅에 사는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민과 그 다음 세대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다. 

 

박지연 | 영화평론가, 부산어린이어깨동무 운영위원이며 부산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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