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굴에서 온 편지]
친애하는 한국의 친구분들께
데이빗 벤바우
편집자주
이번 호부터 한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는 데이빗 벤바우씨가 한국의 시민들에게 전하는 평화의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연재 제목은 ‘여우굴에서 온 편지’입니다. 여우굴이 뭘까요? 야전에서 군인 두세 명이 전투를 하기 위해 파는 구덩이를 보통 참호라고 합니다. 여우굴(Foxhole)은 군인 한두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만 판 참호로 주로 미군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벤바우 할아버지는 한국 DMZ에서 근무할 때 이 여우굴에서 해 질 무렵에서 동이 틀 때까지 보초를 섰습니다. 1968년 당시 DMZ 지역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벤바우 할아버지는 밤에는 여우굴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주변 숲에서 관측되는 움직임이나 소리 때문에 잔뜩 긴장을 했고, 때때로 나타난 고라니가 반가웠지만 한 번은 스라소니가 여우굴 근처에 앉아 있는 바람에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밤을 지새우다가 허기가 지면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먹었고, 소음도 움직임도 없는 평온한 시간에는 고향의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군 카투사 동료와 야간 근무를 설 때는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서로의 가족과 문화 얘기로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운 카투사 동료 중에는 얼마 뒤에 DMZ에서 아깝게 목숨을 잃은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추억과 아픔이 담긴 곳이기에 그때를 돌아보며 쓰는 편지의 제목이 ‘여우굴에서 온 편지’가 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분단의 아픔과 우리가 모르던 비무장지대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살고 있는 미국인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미군 보병으로 한국에 가서 1968년부터 이듬해까지 16개월을 복무했습니다. 그 16개월은 저의 삶을 영원히 바꾸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저의 그때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DMZ 전쟁’이라고 불리던 1960년대에 한국에서 근무한 대한민국과 미국의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68년 1월에는 청와대 습격사건과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 사건 등이 일어났고, 제가 있었던 비무장지대 일대에서도 수많은 소규모 교전이 있었습니다. 남북한은 전쟁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있었습니다.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북한군에 의해 격추당했고, 수송열차가 폭파되었고, 미군 막사들이 포격을 당했습니다. DMZ에서의 교전은 일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그 삼 년 동안 발생한 수천의 남한과 미국 병사들의 희생이 한국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1969년 말이 되면서 북한의 습격은 중단되었고, 남북한은 팽팽한 긴장 가운데 평화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분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1967년 6월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으로 복무하셨고, 삼촌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셨기 때문에 저는 적당한 나이가 되면 입대하는 것이 제 의무라고 늘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들려주신 군 시절 이야기에 푹 빠지곤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미국인으로서 군 복무를 하는 게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에 1967년 여름, 자원입대했습니다. 그때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지요.
저는 당연히 베트남으로 보내질 거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968년 2월에 기본군사훈련을 끝내고 총 8주의 상급 보병 훈련에 들어갔는데, 훈련이 5주 만에 갑자기 중단됐습니다. 곧바로 훈련병 전원은 남한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제 동료 대부분은 전쟁이 치열했던 베트남으로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심했지만, 저는 훈련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한국으로 보내는 이유가 무얼까 궁금해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병사들이 DMZ 안팎에서 싸우다 죽어간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1968년에 한국에 도착해서야 전투에 대해, 군함의 나포와 청와대 습격 시도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DMZ 주변에서 군인으로 근무한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된 거죠.
제가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는 같은 시기에 남베트남에서 수십만의 미군 병사들이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52,0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뉴스는 온통 베트남 소식 투성이였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한국의 DMZ로 파견된 군인들도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968년 여름, 약 25명의 제 소대원 중에 미국 친구 네 명, 한국 친구 두 명이 DMZ에서 총에 맞았습니다. 친구 마이클 리마르추크(Michael Rymarczuk)가 1968년 7월에, 카투사 친구 권혁국 일병이 1968년 8월에 사망했습니다. 1968년 9월 27일에는 또 다른 제 친구 조셉 코이어와 마이크 레이놀즈가 DMZ 우리 중대가 맡은 지역에서 매복하던 북한군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 DMZ 형제들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참 역설적인 곳이었어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DMZ 지역은 대부분 폭격을 당하거나 불에 타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1953년 폭격과 전투가 중단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풀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고, 키 작은 덤불과 수풀, 나무들도 다시 자라났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더 많은 식물들이 되돌아오고 꽃을 피우더니 회색과 갈색이었던 비무장지대는 다시 아름다운 초록빛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DMZ에 도착한 1968년 봄, 초록의 습지에는 풀들이 무성했고,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녔으며, 파충류와 양서류가 번성했습니다. 습지대에서 새들은 풀숲 사이를 날아다니며 먹잇감을 구했습니다. 비무장지대에는 두루미들이 날아오곤 했습니다. 아주 드문 종류였지요. 그때 저는 두루미들이 암수가 짝을 지으면 평생을 함께 하고, 그 때문에 한국 문화에서 두루미는 화합을 상징하며, 부부 사이의 금슬을 기원하고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DMZ에는 꿩, 원앙, 거위, 매, 말똥가리, 뻐꾸기, 딱따구리, 부엉이 그리고 까치 같은 새들이 가득했습니다. 밤에 여우굴에 앉아 있거나 야간 매복 때 숲의 바닥에 누워있노라면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DMZ는 인간의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천혜의 야생 동물 보호구역이 되었고 수많은 새와 포유동물을 불러들였습니다.
DMZ에는 다른 많은 동물도 살았습니다. 커다란 개만 한 고라니들도 있었습니다. 고라니들이 밤에 내는 소리는 마치 여자가 “살려 주세요”라고 소리치는 것과 비슷하게 들렸습니다. 밤에 그 소리를 들을 때면 왠지 으스스했습니다. DMZ에는 토끼, 멧돼지, 반달곰, 개구리, 뱀과 삵괭이도 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DMZ는 야생 동물들의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어떤 동물들은 희귀종이거나 멸종위기에 처한 것도 있습니다. 이렇듯 DMZ에는 100종 이상의 보호 동물들이 있습니다. 남북한 양쪽에 설치된 높은 철책이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때문에 이런 동물들이 번성할 수 있습니다. 철책 꼭대기는 철조망으로 덮여 있고, 사이사이 지뢰와 경비초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의 비무장지대가 잘 보존되어서 수많은 희귀 동식물의 피난처로 남고, 북한과 남한이 평화롭게 지내며, 관광객들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그곳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도록 개방되는 것이 저의 바람이며 꿈입니다. DMZ에는 아직도 지뢰가 수도 없이 많은데 관광객들을 위해서는 제거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지구상 모든 나라의 대표들이 만나서 평화를 유지하고, 이웃 나라와 갈등이 생겼을 때는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도 저의 꿈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비무장지대는 ‘평화는 전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유지될 수 있고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세계에 보내는 곳이 될 겁니다. 그런 대화와 협상은 DMZ 컨퍼런스 센터에서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고 DMZ의 아름답고 소중한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 일하는 단체가 몇 군데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에서 조직된 DMZ 포럼도 그중 하나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DMZ는 참 역설적인 곳이었습니다. 야생의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요. 제 평생에 제일 위험한 곳이었어요. 이 아름답지만, 위험했던 곳에서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편지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여러분은 모두 한국에 사시는 분이겠지요. 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읽어주실 분도 계시겠고요. 이 편지를 읽는 분은 십 대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저의 이야기는 그분들의 이야기입니다.
비무장지대의 남쪽은 여러분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니 비무장지대의 미래는 여러분이 결정하셔야 할 겁니다. 남북한이 비무장지대를 미래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이나 일본, 중국이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와 제 DMZ 형제들이 희생을 치렀기에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셔서 DMZ를 보존하기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결정은 여러분 것입니다.
저는 1969년 6월 제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2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법대에 입학해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 뒤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와 결혼했고 아이 일곱을 두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군대와 한국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아름답고 거친 DMZ의 자연, 그 안에 녹슨 채 서 있는 증기차의 포탄 구멍에서 들쭉날쭉 자라난 덩굴, 콘크리트로 지어진 역처럼 생긴 건물(우리는 시장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Mayor's House)과 글래디스 전초기지, 그리고 긴 밤에 목격했던 동물들과 동물 소리, 도와달라고 소리쳤던 고라니와 갑자기 우는 소리를 멈추어서 나를 놀라게 했던 벌레들과 개구리들, 그때의 고요한 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느 밤 제가 앉아 있던 여우굴 끝에 앉아 있던 살쾡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제가 고라니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것을 즐겼고요.
저는 인도의 이야기들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만큼 글재주가 있지도 않고, DMZ의 경제적 정치적 배경을 설명할 재간도 없습니다. 남북한의 적대 관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북한의 사람들이 오랜 역사를 공유한 한민족이었으며 지금은 그저 이념과 DMZ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DMZ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곳에는 생명과 신비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가 여우굴에서 쓰는 편지로 한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평화를 지키려고 했던 일이 실제로 어땠는지를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2년 여름
데이빗 벤바우 드림
데이빗 벤바우 | 1968년부터 16개월 동안 한반도 DMZ에서 미군 보병으로 복무한 미국인.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곱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의 추억과 아픔이 담긴 DMZ에서의 기억을 한국의 시민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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