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평화]
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 국민을 죽인 정권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하다!
임재근
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 제주4·3사건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5·10단독선거를 거부하면서 증폭되었고, 여순사건은 제주 4·3 진압 출병 명령을 거부하면서 촉발되었다. 불안한 미래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대가는 참혹했지만, 그들의 거부는 항거였고, 항쟁이었다. 제주4·3사건의 여파로 군법재판을 받고 여러 육지 형무소로 이감된 제주 사람 중에서 7년 형을 선고받은 30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수백 명의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이 대전으로 압송되어 임시군법재판소에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6월 18일, 제주4·3사건 진압을 맡고 있던 제11연대장 박진경이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면서 군대 내 숙군작업이 시작되었고, 10월 19일 여수 주둔 제14연대의 봉기를 빌미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대대적인 숙군작업은 1949년 7월까지 진행되었고, 이 시기까지 숙군작업의 결과 당시 군 병력의 약 5%에 달하는 4,749명의 장병이 처벌받았다. 숙군작업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정권이 군대를 믿지 못한 결과 벌어진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군대 내 반대 세력을 숙군작업을 통해 제거해 나갔으나, 군대 밖에 있는 국민을 숙군작업처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은 자신을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국민을 처벌하기 위해 여순사건을 빌미로 국가보안법 제정을 서둘렀다. 당시 국가보안법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 침해의 우려가 커서 국회 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1948년 11월 9일에 국가보안법 제정 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자, 제헌의회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당일에 국가보안법 폐기안을 상정하면서까지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폐기안은 부결되어 국가보안법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조선일보>조차도 국가보안법이 국회에 상정된 직후인 11월 14일 자 사설에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이라는 제목으로 국가보안법 제정을 강한 어조로 반대했다. <조선일보>는 “방금 국회에 상정된 국가보안법은 광범하게 정치범 내지 사상범을 만들어 낼 성질의 법안인 점에서 우리는 단호히 반대한다.”며 사설을 시작했다. 결국 12월 1일 국가보안법은 제정되었고, <조선일보>의 우려대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는 국민이 다수 발생했다.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지만,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지 않는 국민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법을 위반하거나 저촉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국민을 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 결성에 나섰다. 과거 공산주의 활동의 경력이 있거나, 사상범 경력이 있는 이들을 주로 가입 대상으로 삼았지만, 공무원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사상에 관계없이 평범한 이들에게 고무신이나 비료를 주는 조건으로 가입 도장을 받는 일이 빈번했다. ‘반(半) 강제 가입’의 경우도 있었다.
국민을 죽인 정권
한국전쟁은 ‘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이 국민을 죽이는 빌미로 활용되었다. 아무리 형무소 재소자라 하더라도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은 이들을 죽이는 일은 법치 국가에서는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 정권은 형무소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경우, 자신의 반대 세력이 될 것을 우려하여 예방적 차원에서 재소자들을 죽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려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며, 심지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국민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위임한 군대 권력이 오히려 국민의 목숨을 빼앗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국민은 국가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당시 범법자에 해당하지 않았던 국민보도연맹원들도 형무소 재소자와 마찬가지로 북한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학살당했다. 국가가 주도해 결성한 조직에 국가를 믿고 도장을 찍고 가입했는데, 그것이 살생부가 되어 돌아왔다는 점에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더 큰 배신감을 만들어 냈다.
2005년부터 2010년 동안 활동한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총 3차례에 걸쳐 학살이 진행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차는 1950년 6월 28일경부터 6월 30일경까지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와 예비검속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이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되었다. 헌병대가 총살하고 헌병지휘자가 확인사살하였다. 2차는 7월 3일 경부터 7월 5일까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정치사상범, 징역 10년 이상 일반사범, 보도연맹원 등 약 1,800명이 군과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3차는 7월 6일부터 7월 17일까지 서울을 비롯한 경인 지역 형무소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검거된 재소자, 청주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충남지역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되었다. 이 기간 동안 수백미터에 달하는 여러 개의 구덩이에 최소 1,800명 이상에서 최대 7,00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학살 당했다하여 뼈들의 영혼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골령(骨靈)골’이라고 부르고, 그 앞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되었다.
한국전쟁 초기 군·경에 의한 대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예비검속과 학살이 반복적으로 진행된 형태를 띠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보충할 사실은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사이에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1950년 9월 말, 국군과 미군이 대전을 수복한 이후에 벌어진 소위 ‘부역혐의자’ 학살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세 차례의 학살에서 1950년 7월 1일~2일 사이에 학살이 멈춘 이유는 7월 1일에 대전에서 발생한 피난 소동때문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학살이 시작된 시기는 한국전쟁 직후 3일이 지난 후부터였고, 대전이 7월 20일에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것을 고려한다면 학살의 시기가 빠르고, 기간도 길다.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대전전투가 있기 직전까지 학살을 지속하며 학살의 규모가 클 수 밖에 없었다.
국민을 죽인 증거
국민을 죽이라는 명령은 도대체 누가 내린 것일까? 재미 학자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에서 비공개로 소장해 오던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보고서와 여기에 첨부된 18장의 사진을 1999년 12월에 발굴해 냈다. 2장짜리 보고서에는 “대전에서의 1,800여명의 정치범 집단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며, 학살의 규모와 대상 그리고 시기와 기간까지 명시하고 있다. 3일간 1,800명이 죽음의 구덩이로 내던져졌다면, 20여 일간 최대 7,000명의 희생이 불가능한 수치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처형명령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최고위층’은 누구일까? 당시 대전은 임시수도가 되어 버렸고, 이승만 대통령뿐 아니라 국방장관을 비롯한 다수의 장관과 국회의원들까지 대전으로 피란을 와 있던 상황이었다. 법에 의거해 사형을 집행할 때에도 대통령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당시 임시수도였던 대전에 대통령이 있던 상황에서 국민을 향한 불법적인 총살집행을 대통령이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몰랐다고 하면 더 큰 문제가 된다. 대통령의 통수권 아래 있던 군인들이 대통령도 모르게 수천 명의 국민을 죽였다면 그것은 군사 반란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보고서에 첨부된 18장의 사진에는 학살 현장의 처참한 장면이 생생하게 포착되었다. 트럭에서 경찰들이 내리는 찰라, 먼저 내린 다수의 민간인이 고개를 땅으로 향한 채 바닥에 앉혀 있다. 주변에는 철모를 쓴 헌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청년 방위대와 소방대원들은 처형 대상자들을 끌고 가,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엎어 놓고 물러났다. 그러면 군인과 경찰이 엎드린 이들의 등을 밝고 총구를 뒤통수에 가져갔다. 아무리 군인과 경찰이라 하더라도 합법적인 사형집행도 아니었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총을 국민을 죽이는 데 써야 한다는 상황을 따르기에 고뇌가 컸을 것이다. 하지만 뒤에 있던 지휘관이 권총으로 위협하며 총을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지켜야 하는 국민을 죽이는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그렇게 학살은 스무날 동안 이어졌다.
미국의 책임과 국가의 과제
그런 학살 장면을 지켜보며, 보고서를 작성해 워싱턴의 미국 육군 정보부로 보낸 인물은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즈(Bob E, Edwards) 중령이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인물은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orean Liaison Office, KLO)의 총책임자 애버트(Abbott) 소령이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학살의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리기 위해 보고서에 처형명령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라 표현했지만, 미국도 학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 미군은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해 한국군의 편성, 작전, 교육훈련, 군수업무 등에서 활동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소위 ‘상대역 제도(Counterpart System)’라는 운영방식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950년 12월 서울 북쪽 홍제리에서 형무소 경비병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영국군들이 “이것은 학살”이라며, “우리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 거야?”라며 동맹군이었던 한국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유엔군 사령부에도 거센 항의를 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학살을 저지하거나 규탄하지도 않은 미군의 모습은 영국군과 대조된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최소 1,800여 명에서 최대 7,00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대전지역에서 학살되었다. 희생된 사람들이 대전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아닌 충남 각지와 심지어는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대구10월사건 관련 수감자 등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대체로 한국전쟁 시기 시·군 단위에서 발행한 민간인 학살의 경우 500여 명에서 최대 2,000여 명이 학살당했는데, 최소 1,800여 명에서 최대 7,000에 이르는 학살의 규모는 가히 충격적이다. 대전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역할, 정치범수용소로의 대전형무소, 충남의 행정·사법 기능이 집중되었던 특성으로 인해 희생 규모가 훨씬 크게 되었다.
군·경의 민간인 학살은 ‘예방’이라는 명목 아래 체제 반대세력을 제거 대상으로 삼고, 포괄적 제거정책을 펼쳐 희생 규모를 키웠다. 특히 신변 보장을 약속했던 국민보도연맹원을 대대적으로 처형하면서 공권력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불신도 키웠다. 국민을 믿지 못한 정권이 국민을 죽인 사건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잃었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히 진상규명에 나서고, 더불어 재발 방지를 위한 평화, 인권교육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또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빠짐없이 발굴해 내기 위해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임재근 |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사무처장 겸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다. KAIST 산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이후 통일운동과 통일교육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해 북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논문으로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와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가 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영동 노근리 등 평화기행 해설에 나서고 있다. 2021년부터 공주대학교에서 ‘북한의 이해’, ‘한반도 평화와 쟁점’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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