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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1_1 김영환_한일관계의 파탄, 수백조 원의 비즈니스 기회, 그리고 ‘99엔’

by 어린이어깨동무 2022. 8. 18.

[한반도 이슈] 

한일관계의 파탄, 수백조 원의 비즈니스 기회, 그리고 ‘99엔’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고 그 실상을 조사·확인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청구권협정을 체결한 것일 수도 있다. 청구권협정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하지 않은 책임은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피해자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2018년 10월 30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위 글은 판결문의 끝머리에 김재형, 김선수 두 대법관이 다수 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으로 밝힌 내용이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 속에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고 두 대법관은 피해자들의 오랜 ‘고통’에 대해 언급했다. 판결이 내려진 날로부터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과연 피해자들의 고통은 해결되었는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았다고 언급된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지난 4년 동안 피해자들의 고통과 마주해 왔는가?

2018년 대법원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여년이 넘게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싸워 쟁취한 역사적인 승리이다. 이 판결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세계사의 흐름을 반영한 획기적인 판결,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의 성과를 반영한 기념비적인 판결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이 판결은 한국의 법원에서 내려졌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이루어진 소송 투쟁이 없었다면 결코 쟁취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일시민들의 끈질긴 연대투쟁이 이른바 한일청구권협정의 ‘65년 체제’를 함께 극복해 낸 역사적인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등 가해 기업은 책임을 인정하고 판결을 이행하기는커녕 문제의 해결을 위한 피해자 측과의 대화마저 모두 거부해 왔다. 나는 2019년에 일본제철 소송 지원 단체의 한 사람으로 변호단과 함께 도쿄 중심가에 있는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본사를 찾아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화를 요청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가해 기업의 책임자 그 누구도 우리 일행을 만나주지 않았다. 피해자 변호단과 지원단은 판결 이후에 모두 세 차례 가해 기업을 찾았지만, 그들은 문전박대로 일관했고 심지어 가해 기업 앞으로 몰려온 우익세력이 우리 일행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국제법 위반이라는 한 마디만을 되풀이하며 한국의 사법주권을 무시하고 있는 일본 정부. 그리고 일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가해 기업이 피해자 측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는 이상 피해자 측은 정당한 권리행사로서 판결의 집행 절차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행 절차에 들어가자 일본 정부는 재판 서류의 송달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거나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송달을 거부하여 모두 공시송달¹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고, 2018년 판결이 내려지고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피고 기업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현금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 공시송달: 법원이 송달할 서류를 보관해 두었다가 당사자가 나타나면 언제라도 교부할 뜻을 법원 게시장에 게시하는 송달방법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기자회견

 

최근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대상으로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쟁취한 판결의 이행을 둘러싸고 현금화가 집행되면 “한일관계가 파탄 날 것”이라는 보도가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넘치고 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 소송투쟁을 통해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권리회복을 위해 노력해 온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는 최근 한겨레 인터뷰를 통해 한일관계 파탄론에 대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른바 ‘현금화는 한-일 관계 파탄을 뜻한다’는 주장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양국 시민사회에서도 나오는데, 그 의미를 모르겠다. 대체 ‘파탄’이란 뭘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같은 상태인가? 가해 기업 한국 내 자산 현금화가 이뤄지면, 자위대가 독도에 상륙하거나 서울에 미사일 공격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역으로 주일 한국대사가 일본 총리를 면담할 수 없는 현 상황은 우방국 간 통상적인 관계로 볼 때 이미 파탄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파탄’ 운운하는 주장은 ‘여기서 더 나가면 큰일 난다’며 피해자를 위협하고, ‘이제 적당히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것일 뿐이다.” 

 

이른바 한일관계의 파탄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자신의 인권 회복을 위해 평생 싸워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보다 중요한 한일관계, 국익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7월 26일, 윤석열 정부의 외교부는 대법원에 현금화를 사실상 미뤄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박근혜 정권 당시 사법 농단이라는 범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민사소송규칙을 활용하여 범죄에 가담한 외교부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피해자들의 정당한 집행 절차를 지연시키고자 그 규칙을 다시 활용하여 현금화의 동결을 시도한 것이다. 8월 8일, 윤덕민 주일대사는 현금화가 이뤄지면 수십조 원, 수백조 원에 달하는 비즈니스 기회가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며 현금화를 동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80년 전 10대의 나이에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가 침략전쟁의 한 가운데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어 살아남은 강제동원 피해자들. 그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인간의 존엄을 되찾고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평생을 싸워서 쟁취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 사법부의 판결 정신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절절한 외침이 수백조 원의 비즈니스 기회에 견주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내 목숨 값 931원’, 지난 7월 6일 93세의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 정신영 할머니는 강제노동 당시 가입한 후생연금 탈퇴 수당이라며 일본 정부가 보내온 ‘99엔’을 받았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서로의 ‘국익’을 논하며,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꾀하고 있는 지금, 피해자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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