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교실 이야기2]
마라탕 맛 평화
주예지
평화란 대체 무엇일까?
참 어려운 -누가 나에게 물으면 어색한 미소와 애매한 대답으로 교묘히 피해버리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침을 떼고 아이들에게 슬쩍 던져 보았다.
3년 전, 처음 평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체험 행사 위주로만 몰아쳤던 시행착오를 기억하면서 이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평화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4~5월에는 평화와 관련된 책을 스스로 선택하고 읽은 후에, 발표 및 토론 활동을 진행했고, 6월에는 유네스코에서 진행하는 평화열전을 썼고, 7월에는 1학기 활동을 마무리하며 2학기 활동을 기획했다. 1학기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활동지에 쓱 넣은 질문이 바로 ‘평화란 대체 무엇일까?’이다. 이전에 다른 활동지에서 보고 아이들이랑 해봐야겠다고 메모해두었던 질문으로 좁혀서 던졌다.
평화는 무슨 맛일까?
가족과 함께 먹는 저녁밥 맛이야. 왜냐하면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사랑하는 가족과 밥을 먹을 때 가장 편안하기 때문이지.
평화는 더운 날 마시는 시원한 물 맛이야. 왜냐하면 전쟁이나 갈등 해결이 기분 좋고 통쾌해지기 때문이야.
습하고 무더운 날 먹는 시원하고 달달한 아이스크림 맛일 것 같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순간만큼은 온몸이 시원해져,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소중한 평화 같기 때문이다.
대부분 긍정의 맛이다. 고단한 일을 끝내고 맛보는 달콤한 평화의 맛. 그러다 눈길이 가는 맛 발견!
평화는 마라탕 맛이야.
그래! 평화가 항상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알싸한 마라탕 맛 평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 피스레터에 써 볼까? 피스레터 소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재료들을 섞어 만든 음식인데 이처럼 평화도 우리들의 가지각색인 생각들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야.
당황했다. 이런 의미의 비유는 ‘비빔밥’이 최강자였는데...! (조사 결과 요새 여학생 최애 음식이 마라탕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들으면 단번에 야유를 보낼 라떼 한 잔을 마시면서 평화와 마라탕의 유사성을 찾아본다. 첫째, 아이의 말처럼 평화와 마라탕 모두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다. 마라탕은 한 가지의 재료만 넣으면 맛이 없다. 다양한 채소와 육해공의 재료들이 탕으로 섞여야 진정한 마라탕을 즐길 수 있다. 평화의 가치를 논할 때도 다양성은 기본 전제가 된다. 둘째, ‘알싸함 뒤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다. 혀가 얼얼해지는 맛이 매력인 마라탕은 다음날 배 속에서 요란하게 몰아치는 후폭풍도 잔인하다. 그렇다면 평화는? 사실 나는 평화가 맵다. 알면 알수록 달지 않고 무척 맵다. 아슬아슬한 평화를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경험해 왔는가? 대가 없는 평화가 있을까? 우리는 온전한 평화를 누린 적이 있는가? 셋째, ‘선택’할 수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자신이 먹고 싶은 재료만 선택할 수 있는 마라탕처럼, 평화도 때로는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상황을 취사선택해서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이의 처음 의도와는 무척 멀어진, 다소 억지스러운 생각을 꾸역꾸역 이어나갈 때 즈음, 도돌이표가 등장한다. 아니, 그래서 대체 평화는 무엇일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평화는 ‘①평온하고 화목함. ②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 전자는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평화를 뜻하고, 후자는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평화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평화에 대한 다양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불충분하다. 시대에 담긴 사회·문화적 가치에 따라, 종교 및 사상에 따라, 언어에 따라, 학자에 따라 다양한 평화의 정의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평화를 정의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껏해야, 부분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류학자인 Strathern(1991)에 따르면 부분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며, 전체와의 관계를 논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부분들 간의 상호관계이다. 이러한 부분성의 관점은 각기 다르게 정의 내려지는 평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작은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다. 우리는 부분이 있으면 전체를 상정하고 통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부분 간의 틈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앎이 성장한다면?
평화의 이름을 한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가지로 모으고 묶는 것이 아니라, ‘나’의 평화와 ‘너’의 평화가 각 부분으로서 만난다면? 그 만남의 틈 사이에서 새로운 이해와 의미가 생겨난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연결점들을 무수히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평화를 상상해내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마라탕에서 시작해서 갑자기 뜬구름을 잡았다. 알 길 없는 평화에 대해 여러 상상을 해 본다. 여전히 평화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는 일에 집착한다. 심지어 그 일을 시침 뚝 떼고 아이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제 질문을 바꿔 보자. 우리는 ‘어떠한’ 평화를 상상하고, 그 평화들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흐음... (어려운걸) 이것도 아이들에게 떠넘길까?
2학기에는 ‘우리가 만드는 평화기행’이 예정되어 있다. 아이들 스스로 일정을 짜고 내용을 기획해보는 것으로 1학기 동아리 활동이 끝이 났다. 아주 신이 나서 활동지를 적어 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이 다시 심상치 않다. 학교 전체 일정으로 예정되어 있는 체험 활동도 취소된다고 하는, (아이들에게는 무척) 흉흉한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일을 자기들한테 떠넘기려고 하는 흉흉한 눈빛의 교사도 도사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게 방학을 즐기고 있을,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여름날 밤이다.
주예지 ㅣ 국어가 어렵다는 아이들의 투정 어린 원성에 나도 어렵다며 유치한 설전을 벌이며 지내는 국어교사입니다. 살아있는 국어 수업을 꿈꾸지만 여전히 길을 못 찾고 주변을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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