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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3_5 최관의_철민이와 노마

by 어린이어깨동무 2023. 2. 16.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1] 

철민이와 노마

최관의

 

2022학년도 2학기는 내게 특별한 시기였다. 내부형 교장 임기 4년을 마무리하고 91일 자로 이수초등학교에 발령받아 3, 5학년 체육교과를 했다. 4년 전 4학년 담임에서 교장으로, 다시 교사로. 역할이 바뀜에 따라 거기에 맞춰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주변은 잠시도 적응할 여유를 주지 않았고 나는 빠르게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경계인,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경계선에 서 있는 나는 경계인이다. 이제 1년 뒤 정년퇴임이라는 또 다른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변화가 두렵다거나 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게 다가오는 것이 곧 나다.’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려 하지만 쉽지는 않다. 경계선에 서서 홀로 내 나름의 길을 만들어가도록 하는 힘은 수업 시간에 만나는 아이들에게서 나왔다. 한 학기 나와 함께 지낸 아이들이 참 고맙다. 그 가운데 남다른 기운을 주고받은 두 아이가 떠오른다. 3학년 철민이와 노마.

 

철민이는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 마음에 안 들면 모래 뿌리고 지나가는 아이들 툭툭 치고 욕도 하고. 수업 시간마다 이런 모습은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이제 이 녀석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한 걸음씩 내딛어야지. 잠깐 쉬는 동안 그네 타던 여자아이 몇이 왔다.

 

관샘, 철민이가 자꾸 모래 뿌려요.”

"그래? 철민아, 이리 와봐."

내 눈을 살짝 피하면서 아이들을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는 꼼짝 안 한다. 내 눈치를 살피면서 여자 아이들을 째려본다. 화가 올라오고 입에서는 '너 왜 자꾸 모래를 뿌리냐? 한 번만 더 그래봐라.'라는 말이 튀어나오려 한다. 우아하게 감정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철민아! 그네가 타고 싶니?”

말은 안 하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그래. 그네가 타고 싶구나. 그럼 말을 하지, 그네가 타고 싶다고. 모래를 뿌리니까 아이들은 그런 네 마음은 알아주려 하지도 않고 내게 항의만 하잖아. 말을 하면 좋겠다. 그래도 네 말을 안 들어주면 내가 도와줄게.”

고개만 끄덕이는 철민이 눈에서 밝은 기운, 애정어린 빛이 보인다. 몸을 쥐어짜며 우아 떤 게 성공하는 중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감이 온다.

 

그네 주변에서 철민이를 외면하고 시끌시끌하게 노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부드럽고 우아하게 그러나 꽉 움켜쥐는 느낌으로 말했다.

애들아, 철민이도 그네가 타고 싶대. 얼른 타고 남에게도 양보하자.”

철민이 표정이 누그러진 게 또렷하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시범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원반 던지기 시범 누가 해줄래? 세 사람!”

누가 손을 번쩍 들었을까? 철민이다. 그네 타고 싶어 모래 뿌린 건 잊고 원반경기 시범을 보이겠단다.

좋아. 철민이 있고 또 누구?”

시범 보이겠다고 나오는 철민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귀에다 대고 한 마디 했다. “철민아! 그네가 타고 싶니?”라고 할 때처럼 억지로 쥐어짜낸 말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올라온 진심 어린 말이다.

난 네가 좋다.”

 

나흘 시간이 흘렀고 체육시간이 되었다. 체육수업하러 나오면서 철민이가 나를 부른다.

관샘!”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녀석을 안아주면서 말했다.

철민아, 친구들에게 모래 뿌리고 싶은 일이 벌어지면 나한테 말해. 난 네 편이야. 너를 도와줄 거야. 그리고 있다가 원반 던지기 시범 보여달라고 할 때 얼른 챙겨줘.”

준비운동으로 운동장 세 바퀴를 도는데 오늘은 남들 괴롭히지 않고 바른 자세로 정성스럽게 돌더니 가장 먼저 들어와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관샘! 세 바퀴 돌았어요!"

꼭 안아주는데 살이 없다. 크느라 그런지 아니면 뭔가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게 있어 살이 안 찌는 건지.

 

"! 멋지다. 멋져."

"난 선생님 아들이에요. 아들."

같은 반에 민식이라고 있는데 이 녀석을 아들이라고 했더니 그게 마음에 있었나 보다.

"그래, 너도 내 아들이다. 아들."

오늘은 수업 내내 아이들이 두 번 이른다. 욕했다고 한 번, 준비운동 할 때 너무 빨리 뛴다고 또 한 번.

철민이 이 녀석이 힘들게 했구나."

철민이와 눈이 맞았다. 올라오는 잔소리를 누르고는 살짝 웃어줬다. 오늘은 지난 삼 주 동안 보인 모습에 견주면 눈에 띄게 좋아진 거다. 봄이 한 번에 오나. 꽃샘추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눈도 내려야 봄이 오지.

 

노마 이 녀석과의 남다른 인연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초가을날 아침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다. 난 운동장에서 2교시 체육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관샘.”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5학년과 3학년 교실이 있는 3, 4층을 올려다봤다. 아이들이 가끔 창문을 열고 나를 부르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학교 건물에 매달린 시계를 보니 910. 한참 1교시 수업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인데 창문을 열고 내다볼 리가 없다.

관샘.”

뒤에서 소리가 난다. 사람을 축 쳐지게 하는 맥 빠진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노마가 서 있다. 왼손으로는 땅바닥에 끌리다 시피 신발주머니를 들고 오른손에는 책가방을 든 채 희미하게 입가를 올리며 웃는다.

누군가 등 떠밀어 억지로 집을 나선 모습이다.

 

어디 아파?”

아뇨. 안 아파요. 관샘은 뭐 해요?”

? 나는 수업 준비하지. 우리 노마 보니 반갑네. 이 넓은 운동장에 너랑 나랑 둘 밖에 없다. 우린 보통 인연이 아닌데.”

910분에 오면서도 급한 게 하나도 없고,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아이다운 생동감도 없다. 앞으로 특별히 마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오느라 애썼다.”

안고 막 등을 도닥여주려는데 따스하고 부드럽게 다독여주는 노마의 작은 손이 느껴졌다. 노마의 작고 보드라운 손에서 나오는 기운이 내 온몸에 퍼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노마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아침 먹었어?”

.”

뭐 먹었어.”

…….”

난 오늘 아침에 식빵에다 딸기 잼 발라 양상추 샐러드랑 먹고 왔다. 귤도 먹었지. ?”

…… 콘프로스트. 교실 가기 싫어요.”

교실 가기 싫어? 하긴, 나도 그래. 오늘 아침엔 학교 오기 싫은 마음이 살짝 들더라.”

관샘도요?”

당연한 걸 물어보냐. 오고 싶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

난 학교 오는 게 싫어요.”“그럼 집에 가. 뒤로 돌아서 가면 되지, 뭐 그게 어렵냐?”

터덜터덜 걷다 뒤돌아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안 돼요. 교실 가야 해요. 관샘, 있다가 체육시간에 봐요.”

 

그 뒤로 체육 시간마다 슬며시 다가와 내 손을 잡고는 눈을 빤히 바라보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노마가 체육수업시간마다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관샘, 운동 안 하면 안 돼요?”

준비운동하기 싫어요.”

저기 벤치에 앉아 쉬면 안 돼요?”

귀찮아요. 하기 싫어요.”

몇 번은 봐줬다. 의자에 앉아 쉬게도 하고 내 손을 잡고 같이 놀이 심판을 봐주기도 하고. 내가 짐작 못하는 그 무엇이 노마 마음과 몸에 있는 생기, 생명력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 기운은 잠깐 몇 번 억지로 운동시킨다고 솟아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일단 노마가 믿고 의지할 든든한 언덕이 되어주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잠자다 새벽에 깨면 노마가 떠오른다. 노마의 몸짓과 말과 표정이 보인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깊이 받아들이는 섬세한 녀석이다. 안에 따스한 기운은 가득하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 이제 조금씩 자기 자신 안에 강한 힘, 어려움을 견디면서 노마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힘을 기를 때란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운동장 가에서 기다리다 하교하는 노마를 만났다.

 

노마야! 관샘이랑 운동장 세 바퀴 걷자.”

왜요?”

그냥 너랑 걷고 싶어서. 너무 많은가?”

한 바퀴는 좋아요.”

두 바퀴. 너 그 동안 체육시간에 준비운동 안 한 거 이걸로 퉁 치는 거다. 두 바퀴.”

녀석 손을 잡고 걷는데 손이 참 보드럽고 따스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기운이 참 좋다. 조금만 마음 써도 곧 힘이 올라오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마야! 체육시간에 운동장 돌기 꼭 해야 한다. 그건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에잇, 잔소리 안 하려했는데 직업이 선생님이라 또 잔소리하네.”

알았어요. 그 대신 한 바퀴만 돌게요.”

아니,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돌아. 대신 넌 걸어도 좋아. 천천히 해도 꼭 두 바퀴 하기. 아무나 안 해준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특별히 봐주는 거야.”

그 뒤로 노마는 준비운동인 운동장 두 바퀴 돌기만은 꼭 했다. 그러다 원반놀이에 참여하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났고. 여전히 귀찮다는 말, 힘들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지만.

최관의 ㅣ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서울이수초등학교에서 (3, 5학년 체육교과) 교사로 살고 있다. 마음껏 어린 시절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 청소년 시절 이야기를 담은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 열일곱, 내 길을 간다, 열아홉, 이제 시작이야(보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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