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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3_4 데이빗 벤바우_방탄조끼

by 어린이어깨동무 2023. 2. 16.

[여우굴에서 온 편지] 

방탄조끼

 

데이빗 벤바우

 

다음은 제가 DMZ의 경험을 생각하며 1995년에 쓴 시입니다.


방탄조끼

 

은백색 싸구려 사물함이 그의 1969년 주소로 배달됐다. 파병 기간이 끝이 나서 전역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우편료는 미군 본부가 부담했다.

 

사물함을 열어보니 예전에는 헐렁했지만 이제는 작아져버린 카키색 바지와 셔츠 그리고 보이스카우트 배지같이 생긴 훈장과 리본 같은 개인 물품이 보였다. 녹색의 잡동사니들, 초록 양말 아홉 켤레, 헤진 속옷, 손가락 없는 양모 장갑, 낡은 천막 반쪽, 허름한 판초 우의와 위장용 병장 계급장이 붙은 야전잠바도 보였다. 잠바 어깨에는 인디언 헤드 부대 마크, 가슴에는 임진 정찰대 약장이 붙어 있었다.

 

사물함 안에는 래커를 칠한 작고 검은 나무 상자 두 개가 있었는데, 상자 하나에는 세계 곳곳에서 온 편지 56통이 담겨 있고 뚜껑에는 ‘세계 최강’이라는 글자가 빨간색으로 박혀있었다. 그 옆에는 하얀 별 안에 빨간색과 하얀색의 인디언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상자 뚜껑에는 “네, 나는 사막의 골짜기를 걸어가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골짜기의…” 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노란색 용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죽음의 골짜기’ 상자에 담긴 사진들에는 앳된 군인들이 M-60 기관총을 든 모습, 오비 맥주로 건배를 하는 장면, 서로 팔짱을 낀 모습 등이 담겨 있었고, 짓궂은 표정의 군인들과 눈 속에 묻힌 빛바랜 녹색 막사도 보였다. 겨울 내내 초소에 보관되었던 배설물통은 논가에 비워졌고, 마을에 세워진 자전거 뒷바퀴 위에 놓인 살아있는 돼지가 코로 자전거를 지탱하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26년 동안 어두운 사물함 안에 감추어져 있던 방탄조끼를 집어 들었다.

 

사이즈 M

방호복, 상체용, 파편을 막아줌, 목의 4분의 3을 덮는 옷깃

이 방탄 조끼는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착용하면 전투 요원의 사망 원인이 되는

포격과 수류탄 파편으로부터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보호할 것입니다.

 

무게 3.4 kg. 민소매의 탁한 황록색을 띤 나일론 방탄조끼에는 옷깃이 달렸고 허리를 덮는 길이에 측면에서 끈으로 크기 조절이 가능했고 단단한 앞 지퍼에는 똑딱이 덮개가 달려있었다. 조끼는 기름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자잘한 구멍들이 나 있었다. 똑딱이 덮개 아래 한쪽에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스타 스카이”, 금일의 야간 암호

 

그는 조끼에 배인 예의 군 냄새를 맡으며 그것이 어둡고 추운 여우굴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여름에 그걸 입고 짐을 멘 채 행군을 하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위장천으로 싼 헬멧, 방탄모 머리끈에 끼워 둔 살충제, 속모자, 야광탄, 참호용 도구, 탄약, 물,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전투식량, 타바스코 소스, P25 무전기, 돌돌 말린 판초 우의가 담긴 묵직한 군장이 어깨를 짓눌렀다.

 

방탄조끼의 가슴 주머니에 손가락을 넣어보니 흙이 느껴졌다. 아시아에서 온 흙이었다. 엄지와 검지에 잡히는 것을 한 줌 끄집어내니까 마른 주황색 흙이 나왔다.

 

이 흙은 그에게 13개월 동안 집이 되어 주었다. 그곳에서 자고, 파내고, 매일 소총에서 털어내고, 녹회색 모래주머니에 채우고, 눈에서 닦아내고, 코에서 불어냈다. 그 위를 걷고 달리고 기었다. 땀과 눈물, 오줌과 피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는 흙이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손가락 사이로 떨어질까 봐 안절부절 못했다.

 

눈을 천천히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 그는 입을 벌려 흙을 혓바닥에 털어 놓고는 삼켜버렸다.


1990년대에 저는 생존자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이 다치거나 죽었는데 저는 그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살아남았는지?’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제가 정찰조와 멀어지는 꿈을 일 년에 한두 번 반복해 꿨습니다. 전투화나 소총을 찾지 못해서 출동하는 친구들에게 기다리라고 소리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깨어보면 스테이츠빌에 있는 제 집 침대였고 왠지 화가 치밀었습니다.

 

제 친구 마이클이 죽었을 때 저는 같은 정찰조에 없었습니다. 이전 세 번의 매복에는 함께 했는데 말입니다. 1.5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여우굴에서 야간 총격전을 바라봤습니다. 동료들 쪽에서 발사되는 붉은 예광탄과 북한군 쪽에서 날아오는 초록 예광탄을 지켜보고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전투는 철책선 북쪽 편에서 벌어졌고 저는 남쪽 편에서 북한군이 철책을 끊을 경우를 대비했습니다. 제 위치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날 밤 제게 주어진 임무는 DMZ 철책선 남쪽의 제 지역을 지키는 거였습니다.

 

1969년 한국의 비무장지대

 

1968년 여름, 제 소대원 스물다섯 명 중에 여섯 명이 북한군과 벌인 네 번의 교전에서 총에 맞았습니다. 그 중에 두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명은 카투사 소속의 권 이병이었습니다. 권 이병은 목숨을 잃기 몇 주 전에 저와 함께 같은 여우굴에서 근무를 섰습니다. 우리 소대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좋은 친구였는데 영어를 할 줄 몰랐고, 저 역시 아는 한국어가 별로 없었습니다. 미군 친구 마이클 라이마르크추크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얼 제프리, 클리블랜드 데이비스, 리즈 웨더스, 카투사 엄군이 부상당했습니다.

 

젊은 생을 갑자기 끔찍하게 잃은 이 친구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비탄에 빠진 가족들의 삶은 영원히 바뀌었습니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여전히 상처를 지니고 있고, 죽거나 다치지 않은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그들만 총에 맞았는가?” 총에 맞지 않은 저의 삶도 DMZ에서 송 두리째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DMZ에서 함께 했던 동료를 만났을 때 이 마음을 털어놨습니다. 친구들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1968730일 마이클이 죽었을 때 너는 철책선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고, 1968 85일 권 이병이 야간 매복에서 죽었을 때도 너는 다른 곳에 배치를 받았잖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얼마 뒤에 저는 다시 한 번 야간 매복 정찰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소총과 전투화를 제대로 챙겨서 친구 들과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숲이 우거진 언덕에서 (마이클이 죽은 곳도 숲이었습니다) 매복 중이었고 북한군이 우리 아래쪽으로 접근했습니다. 꿈에서 저는 북한군 모두를 제거한 뒤 안심해서 깨어났습니다. 이번에는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침내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DMZ로 파견된 임무를 다한 거였습니다. 그 뒤로는 정찰을 나가는 꿈을 다시는 꾸지 않았습니다.

 

1993년 제 친구 마이클이 죽은 지 25년이 지난 어느 날 필라델피아에서 마이클의 어머니를 찾아 제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스테이츠빌에서 열린 DMZ 참전용사 모임에 초대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이클의 동생과 함께 왔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군인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는지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총에 맞고 너무 오래 고통을 받지 않았다고 위로해 드렸습니다. 어머니께 우리는 시계와 마이클이 달았던 것과 비슷한 약장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마이클의 딸과 연락이 끊겨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딸의 이름은 미키였습니다. 마이클이 한국에 간 후에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친구는 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몇 년 뒤 저는 필라델피아의 한 정보지에 광고를 실었습니다. “미키 라이마르추크님께.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군복무를 했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데이빗 벤바우 704-8**-****”. 광고를 본 친구의 얘기를 들은 미키는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버지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던 탓에 무척 알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1968730일 한국의 DMZ에서 야간 매복 중 돌아가셨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나의 친구였고, 같은 소대에서 근무했으며, 돌아가시기 전에 세 번의 야간 매복 정찰을 함께 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몇 년 뒤 워싱턴 DC에서 열린 DMZ 참전 용사 모임에 미키가 참석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미키는 남편과 함께 왔습니다.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 하는 동안 그녀와 저, 그리고 같은 소대에 근무했던 데일 패튼과 로이드 킹은 함께 울었습니다. 매년 현충일인 730일이 되면 저는 미키에게 전화를 겁니다. 미키는 저를 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아빠가 저의 ‘DMZ 형제였으니까요.

 

2023년 옛날 방탄조끼를 입어본 데이빗 벤바우

 

<방탄 조끼>를 썼을 때 저는 한국을 향한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시는 1995년에 남부 문학상(Southern Prize)을 수상했습니다. 시는 미국 남부 예술가 연합이 발행하는 선집 <더 사우던 앤설러지 The Southern Anthology>에 수록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할 때 약 5만 명의 미군이 한국에 있었고, 그 중에 2천명이 비무장지대에 있었습니다.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목표를 위해 집과 가족, 직장과 학교 그리고 조국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한국군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키기 위해 거기에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70년 전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강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된 것에 대해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어머니와 아버지, 조부모님, 친구, 이웃, 그리고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1953년 이래로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경제적으로 성공했습니다. 이 시는 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은 저의 일부가 되었고, 저도 그 일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데이빗 벤바우 | 1968년부터 16개월 동안 한반도 DMZ에서 미군 보병으로 복무한 미국인.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곱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의 추억과 아픔이 담긴 DMZ에서의 기억을 한국의 시민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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