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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8_4 김경민_몽실이, 쿠르디 그리고 가자...

by 어린이어깨동무 2024. 5. 14.

[문학으로 읽는 나의 평화감수성] 

몽실이, 쿠르디 그리고 가자…

 

김경민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한국전쟁의 비극을, 국군으로 전쟁에 참가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한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외할머니와 그런 외할머니가 저주를 퍼붓는 빨치산을 아들로 둔 친할머니 사이의 갈등으로 표현한 윤흥길의 「장마」는 한국전쟁의 특수성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두 할머니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의 대립과 그로 인한 긴장감을 독자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은 동만이라는 어린아이다.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라는 비극성과 폭력성이, 그것들과는 가장 상반될 것 같은 이미지인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재현되고 있어 전쟁의 잔인함은 더 극대화되어 독자에게 전해진다.

 

우리 집이 항상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문전을 오락가락하면서 울바자 너머로 수상쩍은 눈길을 던지는 어떤 낯선 사내를 종종 볼 수가 있었고, 그가 쳐놓은 투명한 그물에 의하여 우리는 제 발로 걸을 수는 있되 실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물고기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 사내의 모습이 눈에 띌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은 나였다. 그의 출현이 나한테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껏 사그라지려던 죄책감에 대한 무서운 채찍질이면서 새로운 일깨움이었다. 과자 한 조각에 제 삼촌을 팔아먹는 사람백정이라고 소리소리 외치던 할머니의 저주가 당시 그대로의 형태로 또렷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던지는 목침덩이에 맞아 코피를 흘리면서 나는 그날 저녁에 벌써 죽었어야 옳은 몸이었다.

(윤흥길, 「장마」 中)

 

 

빨치산이 된 삼촌의 행방을 캐묻는 낯선 사내가 내미는 과자의 유혹을 차마 이기지 못해 삼촌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이유로 동만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할머니로부터는 사람백정이라는 몹쓸 말을 들어야 했고, 아버지의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동만은 오랫동안 자신의 철없는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죽었어야 할 대상으로 자학하기까지 한다. 동만이 겪은 이 모든 폭력과 고통은, 모두 전쟁 때문이다.

 

 

이런 동만 보다 더 처절하게 전쟁의 참상을 겪었던 아이가 있다면 바로 몽실언니의 주인공 몽실이일 것이다. 권정생의 몽실언니 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소설 중 하나로 꼽히는데, 몽실이가 겪은 전쟁의 참상은 동만이가 들었던 할머니와 아버지의 꾸중에 비할 바가 안 된다.

 

“몽실아, 나랑 구경 가자. (…) 사람을 죽인대. 인민 해방에 방해한 사람들을 죽인단다. 모조리……” (…)
노을이 온통 핏빛이 되어 사람들의 얼굴을 물들였다. 새빨간 얼굴이 흡사 도깨비처럼 이상야릇해진 사람들은 짐승들만 같았다. (…) 몽실이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마당에 들어서는데, 따따따따…하는 총소리가 났다. (…)
‘아버지, 어디서 무얼 하셔요? 공산군을 쏘아 죽이러 갔는데 공산군은 이렇게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이고 있잖아요. 어머니, 난남이가 불쌍하지 않으셔요? 왜 죽었어요? (…) 지금 난 이렇게 엄마도 아버지도 없는 아기를 안고 혼자 무섭게 떨고 있어요. 먹을 것도 없어요. 난남이한테 죽을 쑤어 줄 쌀도 떨어졌어요. 엄마, 엄마……’ 

(권정생, 『몽실언니』 中)

 

 

몽실이는 공산군이 무엇인지, 인민군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이지만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만큼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자기가 늘 뛰어놀던 냇가에서 함께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동생에게 먹일 쌀이 떨어진 것을 걱정하면서 몽실이가 느끼는 죽음에의 공포란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 아니 어린아이가 경험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이 당연한 말은 잔인무도한 전쟁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이렇게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한국전쟁을 역사책이나 영화로만 접한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며진 허구의 이야기로만 여겨질 수 있다. 오히려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은 이런 끔찍한 상황을 외면하고 망각하기에 아주 좋은 구실일 수 있다. 너무 안타깝고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이것은 소설 속 상황일 뿐이라고……. 그러나 과연 이런 상황이 7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이야기, 혹은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작가가 과장해서 꾸며낸 허구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1950년의 몽실이와 2015년의 쿠르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느 한 편에서는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수많은 몽실이과 동만이가 있다. 그들은 소설 속 몽실이와 동만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생(生)이 무엇인지 채 알기도 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먼저 배운다. 흔히 어린아이들에게 묻는 꿈에 관한 질문도 이들에게는 사치일 뿐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조차 없는 이들의 유일한 꿈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꼬마 아이는 어쩌다 저렇게 된 것일까? 이 아이의 이름은 아일란 쿠르디. 그는 시리아내전이 한창인 죽음의 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민의 삶을 선택했지만 (아마도 그는 ‘난민’이라는 단어의 뜻을 채 알기도 전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난민’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해 떠난 여정의 끝은 결국 죽음이었다. 이렇듯 전쟁의 잔인무도함은 어린아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다. 아이들을 향해 직접 총부리를 겨누지는 않겠지만, 일상이 되어버린 총소리와 극도의 배고픔,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은 아이들의 삶을 위협하기에 충분히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폭력이다.

 

출간 직후 뉴욕타임즈에서 50주 연속 베스트셀러로 소개될 정도로 화제를 모은 앨런 그라츠의 소설 난민: 세 아이 이야기(Refugee)에 는 사진 속 쿠르디가 바닷가에서 저런 모습으로 발견되기 이전에 어떤 일을 겪었을지를 짐작하게 하는 상황이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흐무드 역시 쿠르디처럼 시리아내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조그마한 보트에 올라 독일까지의 먼 여정을 시작한 난민 아이다. 

 

마흐무드는 그 사람이 아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흐무드의 심장 박동이 구명조끼를 뚫고 나왔다. 그는 물을 헤치며 다가갔다. 반은 수영이었고, 반은 엄마를 끌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구명조끼는 파란색이고 아빠가 입은 건 마흐무드와 마찬가지로 주황색이었다. 그런데 이 구명조끼는 제대로 작동하였다. 마흐무드는 잠시 엄마를 놓은 뒤 남자의 몸을 뒤집으려고 애썼다. 보트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았던 덩치 큰 남자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 있지만 생명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죽었다. 마흐무드가 시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 죽은 사람은 아무리 많이 봤어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다. 마흐무드는 몸서리를 치고 움찔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죽었다는 건 구명조끼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다. 마흐무드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죽은 남자의 구명조끼 끈을 풀려고 애썼다.

(앨런 그라츠, 『난민: 세 아이 이야기』 中)

 

 

보트가 난파되어 함께 타고 있던 남자의 시체를 마주한 상황에서 어린 마흐무드는 여느 아이처럼 놀라서 울거나 부모님을 찾지 않는다. 아빠는 사라졌고, 그런 아빠를 대신해 마흐무드가 엄마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마흐무드는 당황하고 놀라는 대신 죽은 남자의 구명조끼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죽음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나이지만 마흐무드에게 죽음은, 책에서나 볼법한 여러 단어 중 하나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실제였고, 생과 사의 갈림길이라는 표현 또한 상투적인 수사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모든 비극적 상황 또한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으로 병정놀이를 하듯, 그렇게 쉽게 전쟁을 벌이는 어른들이 만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가자지구에서는 10분마다 어린이가 한 명씩 죽거나 다치고 있다.

 

만약 ‘평화’라는 추상의 단어가 인간의 형상으로 재현된다면 어린이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어린이에게서 꿈과 희망, 웃음과 행복을 빼앗는 가장 잔인한 폭력인 전쟁으로부터 어린이를 지켜야 할 책임은 당연히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전쟁으로부터 어린이를 지키는 것, 더 나아가 지구상의 그 어떤 어린이도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것, 평화란 바로 그런 것이지 않을까.

 

김경민 | 국문학과 정치학 중 진로를 고민하다 문학으로는 사회의 모든 이야기를 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국문학을 선택해, 지금까지 한 발은 문학에 다른 한 발은 문학 바깥의 세상에 두고 있다. 『한국 소설의 인권의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계속 인권과 법, 국가폭력과 시민 등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경상국립대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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