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씨앗, 하나의 풀에 여러 개의 꽃이 있고 - 두 번째 이야기
최연진
날마다 몸을 부대끼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 우리 반과는 달리 학교 전체 학생들과 생기는 마찰은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훨씬 복잡하고 빨리 해결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지난해 여름 방학이 지나고 동아리를 신청하는 날, 지후가 또 화가 나서는 다른 학생들이 신청서를 쓰지 못하게 가로막으며 버티고 섰다가 교장실에서 오래 혼이 났습니다. 아이들에게 지후의 마음을 많이 이해해 달라고 부탁했고, 친구들이 여러 번 숲 산책을 같이 가자고 교장실로 찾아갔지만 지후는 꿈쩍도 안 했습니다. 결국 우리들만 계곡 놀이를 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피구 경기를 하는 날 지후 때문에 경기하던 학생들이 다치고, 경기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교생이 지후가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모습을 보았고, 특히나 1, 2학년 동생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6학년 선배들에게 사과하러 찾아 갔지만 지후는 끝내 사과하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폭력이 있었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교사 회의가 열렸습니다. 선생님들은 지후가 자기 행동에 어떻게 책임을 다할지, 다른 학생들이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회복할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 방법을 찾고 실천할 수 있게 조금 더 기다려 주기로 했고 지후 부모님과 상의했습니다.
그날 저녁 지후는 다친 형의 집에 찾아가 사과했습니다. 사실 지후와 제법 잘 놀던 6학년 선배였습니다. 지후는 형을 찾아가면서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무서워.”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6학년 학생은 “형은 괜찮아, 그런데 우리 반 친구들에게 네가 꼭 사과해줬으면 좋겠어.”하고 조언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전교생이 모이는 자치회 날 지후는 자유발언 시간에 사과하기로 했습니다. 다모임을 시작할 때 “오늘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아, 너무 힘들면 다음에 해도 돼.” 하고 이야기해주었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지후가 혹시 사과하면 아주 크게 응원해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아이가 과연 모두 앞에 설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다모임 시간 내내 지후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자유발언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끝나갈 때 즈음 드디어 손을 들었고 모두 앞에서 사과했습니다. 친구들, 동생들, 선배들, 선생님들 모두 엄청난 환호로 답해 주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한 지후가 기특했고 아이를 잘 타이르고 지도해 준 어머님께도 고마웠습니다. 지후의 실수를 이해하고 넘어가 주신 다른 학부모님들도 고마웠습니다.
대국민(학생) 사과
학교에서 어제 피구 때 일어난 일에 대해 온다모임 때 사과를 할라고 하는데 막상 자유발언 때 너무 떨리고 무서웠는데 막상 하니깐 너무 홀가분했다. 처음에 무서워서 갈피를 못 잡았는데 하고 나니깐 모두들 용서해 줘서 너무 고마웠다. 앞으론 이런 일 안 만들고 잘 지낼 거다. (9. 20.)
여전히 예고 없이 지후의 감정이 폭발하는 때가 가끔 있지만 이제는 담임 교사 없이도 친구들이 지후를 챙깁니다. 이전에는 지후가 누구를 공격했다는 것에 집중하던 아이들도 지후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고, 보건실에 같이 갑니다. “지후가 싸워요.” 하는 말이 들려도 “괜찮을 거야.” 느린 걸음을 걷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제 지후가 무엇을 잘하는지 친구들이 더 잘 알고 저보다 먼저 칭찬합니다. 컴퓨터를 쓰는 공부 시간에는 꼭 필요한 도우미입니다.
유난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서유와도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후를 불편해 하던 친구가 지후와 같이 발표 준비를 하고, 같은 모둠이 되는 일이 거듭되면서 반 아이들과 학부모님들 모두 기뻤습니다. 서유도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후는 서유와 짝이 된 날을 글로 썼습니다. 후련하고 기쁜 마음이 글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서유랑 짝 된 날
사회 시간에 서유랑 짝이 되었다. 너무 좋았다. 서유가 마음을 열어주어서 이제 서로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 서로 같이 지내며 잘 지내보자, 서유야. (너무 짧은데...) (9. 25.)
Nurturing Hope(희망 가꾸기)를 공부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안전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누구도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희생양’ 만들기가 일어나지 않는지, 편을 가르는 분위기가 없는지, 혹시 내가 하는 실수는 없는지 자주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산 공동체를 생각해 봅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교권이 추락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학교에서 충분히 자유롭게 아이들을 지도하고 훈육하고 때로는 부모님의 도움이 꼭 필요한 활동들도 마음껏 합니다. 우리 반 학생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기다려 주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조건 없이 지지해 주는 관계를 남한산 공동체 안에서 느낍니다.
지난 졸업식 때의 일입니다. 졸업생들은 학교에서 만난 모든 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남한산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동생들에게는 남한산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보라고 조언했고 선배를 잘 따라주어 고맙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남한산을 떠나는 것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 아이들은 이곳 남한산이라는 공간과 ‘조건 없이 지지하는 관계’로 만나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앞으로 누군가에게 분명히 그런 사람이 되어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글을 쓰면서 지후의 시 한 편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지후는 자기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를 다시 보니 지후의 시가 Nurturing Hope(희망 가꾸기)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소개해 봅니다.
씨앗
민지후
하나의 풀에
여러 개의 꽃이 있고
한 개의 꽃에 여러 씨앗이 있네
씨앗에서 새 생명이 나오고
착한 마음이 씨앗처럼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가기를.
(2023. 9. 21.)
지후가 가장 치열하게 보냈던 때 쓴 시입니다. 지후의 시구는 우리 반 시집 제목으로 뽑혔습니다.
최연진ㅣ평화롭고 따뜻한 교실을 꿈꾸며 어린이들과 만납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놀고 어린이들 이야기로 수다 떠는 시간이 제일 재밌습니다. 빈틈 많은 선생이지만 너그러운 어린이들 속에서 철없이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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