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나의 평화감수성]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김경민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교과서에서나 봤을 법한 단어, 계엄. 그 단어가 일상의 안부 인사에 오르내린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SNS에서 이 사진을 봤을 때, 요즘 아이들은 시위도 발랄하고 재치 있는 방식으로 한다 싶어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그런데 이어지는 기사를 읽다 보니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경남도청 앞에서 열린 시국선언 자리에 ‘종강보다 기다리는 탄핵’, ‘제 20대는 대통령 탄핵에 다 쓴 것 같아요. 더 이상 윤석열에게 시간 쓰기 싫어요’와 같은 웃픈 메시지와 함께 인형을 보낸 이들은 모두 20, 30대 청년들. 엄숙하고 진지해야 할 자리에 장난 같은 메시지와 함께 인형을 내놓은 이들, 때로는 ‘청년’이라는 진부한 표현으로, 때로는 ‘MZ세대’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불리는 이들, 이들은 왜 시위 현장에 인형을 보낸 것일까?
“보면 뭐 일을 하는 거 같지도 않아요. 뚱한 얼굴로 맨날 무슨 뮤지컬 사이트랑 일본 여행 사이트 같은 거 찾아보고 있어. 점심때도 맨날 혼자 나가서 밥 먹고. 커피점에 혼자 않아서 책 읽고 그러는 거 내가 자주 봤어요.” (…)
“내가 앞에서 어슬렁거리니까 최 과장은 뭐 시키실 일 있느냐고, 급한 거면 자기가 하겠다고 하잖아. 나는 여태까지 그 아가씨가 그러는 걸 본적이 없어. 사무실에 손님이 와도 불러서 시키기 전에는 차 한잔 내오지를 않아.”
(『알바생 자르기』중)
“오야지라고, 나 같은 시다 위에 있는 기술자들을 그렇게 불렀거든, 그치들이 어찌나 야비했는지 몰라. 막내 여동생이나 딸뻘 되는 어린 시다들이 영양실조니 빈혈 같은 거에 걸려서 몸 굼떠지고 손 느려지면 욕하고 때리고...... (…) 하긴, 요즘이야 공장에서 다칠 일이 어디 있겠어. 보호 장비 다 있지, 누가 때리길 해, 쓰러질 때까지 일을 시키길 해. 우리 때랑은 다르지, 완전히 다를 거예요, 그죠? (…) 그런데도 다들 공장에선 일하기 싫다고 하니, 큰일은 큰일이에요.” (『하나의 숨』중)
이 소설들뿐 아니라 여러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또는 『알바생 자르기』의 상황처럼 소위 뒷담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다는 회식 자리와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청년 세대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다. 부모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살기 좋아졌지만, 요즘 청년들은 그런 세상에 감사하기는커녕 매사에 불평불만이다. 책임감은 없으면서 자기 권리는 귀신같이 찾아서 주장하고, 인내심이나 성실함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또래 친구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충족적 삶을 사는 것이 최대 목표인 이기적 생명체가 바로 MZ세대 혹은 청년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에게 덧씌워진 이미지가 그렇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는 청년 세대를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공간인 대학에 있는 나도 뒷담화 자리에서 ‘요즘 아이들’ 운운하며 입에 올렸던 내용이다.
그런데 20, 30대를 이런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나를 포함해 많은 40, 50대들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추운 겨울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겨우 아파트라는 노랫말만 알아들 수 있는 빠른 박자의 노래를 부르며, 순식간에 만든 재기발랄한 메시지와 영상을 SNS로 전하며 낯선 이들까지 끌어모으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신인류가 나타난 것이다. 계엄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모든 사람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그날 밤의 여의도에서부터 광화문 광장과 남태령까지, 희망과 응원의 목소리가 필요한 곳은 어디든 이 신인류들이 출몰했다. 이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기성세대가 그렇게도 걱정하던 무시했던 청년들이 혹시 이들인가? 설마, 그럴 리가. 그들은 사회에는 조금도 관심 없고 자기만 아는 철없고 이기적인 존재들이 아닌가.
하지만 ‘설마’가 맞았다. 한 달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눈비 맞아가며, 추위와 싸워가며 자신들에게 가장 밝은 빛을 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으로 전했던 그들은 바로 20, 30대의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총칼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비겁해지지 않고 용감하게 나섰던 이들을 보며 고맙고 대견한 마음이 들었던 한편 안쓰럽고 애잔한 감정도 함께 들었던 것은, 그간 이런저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들 세대가 지금 어떤 형편인지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사진에서 청년들 대신 인형이 광장을 메우고 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아르바이트 때문에, 공부 때문에, 취업 준비 때문에 현장에 직접 나갈 수는 없지만 불의에 맞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청년들이 가장 아끼는 인형을 대신 보내 자신들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한 것이었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엄숙하고 진지한 정치 현장에서 인형 놀이나 하는 철없는 행동 정도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 인형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저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것을 엄동설한의 길바닥에 기꺼이 내놓을 때의 그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을 함부로 가벼이 여겨서도, 재미있는 이벤트처럼 웃고 넘겨서도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국민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헌법에는 명시되어 있지만, 막상 20, 30대 청년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단 몇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애는 몇 년째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만 하는 나를 한심해했다. 언니,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자기는 언니처럼 아르바이트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된 곳에 자리 잡을 거라고 했다. 주 6일씩 일하면서 정신없이 사는데 낭비, 같은 말을 들으면 억울했다. 어쩌다 아르바이트로 먹고사는 인생이 됐지. (…) 계획과 달리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다 보니 취업에서 멀어졌다. 여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달리 갈 곳을 알지 못해 여기로 떠밀려 온 사람의 몸 안에는 낭패감이 두텁게 쌓였다. (『에트로』중)
수많은 청년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이들의 삶을 두고, 이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보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은 이상, 자신의 기준으로 함부로 누군가를, 또 그들의 삶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함부로 가늠해서도 안 된다. 모두가 똑같이 배고픔을 느꼈던 것이 과거 세대가 겪었던 고통이라면, 몇백만 원짜리 쇼핑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들 옆에서 마감 행사 때 떨이로 파는 빵을 사는 것이 일상의 큰 기쁨 중 하나이며, “잠도 줄이고 게으름 피우는 시간도 줄이고 말도 줄이고 꿈과 기대와 감정까지 줄이며 살았는데 여전히 뭔가를 더 줄여야만”(『에트로』) 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느끼는 자괴감과 낭패감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이 느끼는 고통이다. 이 둘의 무게를 어떻게 함부로 비교할 수 있을까.
좋은 대학과 정규직 취업과 같이 자기 세대의 기준을 함부로 들이대며 ‘라떼는 말이야’와 ‘요즘 애들은’을 들먹이는 이들에게 이 소설을 읽히고 싶다. 아니, 요즘 나온 어떤 소설도 좋다. 20, 30대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열심히’라는 단어조차 그들의 삶 앞에서는 초라하게 느껴진다. 소설을 읽는 것이 직업인지라 어지간한 내용에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 편인데도 유난히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게으름 피우는 시간뿐 아니라 꿈과 기대와 감정까지 줄이며 고단하게만 살아가는 주인공이 안쓰러웠다. 그런데도 힘들어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안간힘을 쓰며 참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세상이 정해놓은 말도 안 되는 높은 기준을 좇느라 망가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볼 겨를도 없이 사는 이들이, 인간의 삶도 모자라 갓생을 살도록 강요받는 이들이, 그렇게 바쁜 와중에 거리로 나온 것이다. 먹고사는 일의 굴레에 갇혀 있기는 다르지 않겠으나, 그래도 하루 정도 휴가를 쓰는 것이 어렵지 않고 몇 만 원짜리 응원봉쯤은 아무런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40, 50대와 달리, 여전히 많은 청년들은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인 휴가를 쓰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하며 최저시급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실제로 자기 삶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들이, 자신들의 그 소중한 돈과 시간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도대체 왜? 시위에 나와서 목소리를 높이면 시급이 오르고, 취업에 성공할 수 있나?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리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 맨 앞자리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며, 가장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자기 권리만 챙기는 이기적인 녀석들라고 손가락질받던 이들이,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나라는커녕 마음 편히 공부하고 일할 수 없는 어지러운 세상을 만든 것에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지난 12월부터 지금까지 추운 길바닥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다만세’를 부르고, 인간 키세스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청년들에게 이 노랫말로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대신하려 한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브로콜리너마저, 『졸업』중)
이 미친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지난 겨울 당신들이 보여준 연대와 공감, 용기와 희망의 몸짓을 잊지 않겠습니다. 세상이 어둠에 잠길 때마다 가장 먼저 밝은 빛을 들고 맨 앞에 서주었던 이 땅의 모든 청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이 미친 세상에서 행복하시길.
|사진출처|
일-공부하는 청년들, 인형 보내 "종강보다 기다리는 탄핵"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88443
김경민 | 국문학과 정치학 중 진로를 고민하다 문학으로는 사회의 모든 이야기를 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국문학을 선택해, 지금까지 한 발은 문학에 다른 한 발은 문학 바깥의 세상에 두고 있다. 『한국 소설의 인권의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계속 인권과 법, 국가폭력과 시민 등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경상국립대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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