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독일의 ‘기억 문화’가 주는 교훈
정지영
체코와 폴란드 방문 후, 참혹한 역사를 반성하고 기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독일 곳곳에는 ‘걸림돌(Stolperstein)’이라 불리는, 나치 희생자들을 기리는 10×10cm 크기의 작은 추모비가 있다. 이 추모비는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장소에 설치되어 있다. 이는 일상에서 나치 독재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범죄에 대한 반성과 추모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독일의 ‘기억 문화(Erinnerungskultur)’의 일환이다. 개인마다 다른 ‘기억’이 공동체의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억에 대한 구성원의 합의가 필요하며, 기억을 공유하고 확산할 때 비로소 온전한 ‘기억 문화’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20세기의 암울한 역사를 기억하며 승화하는 독일 전역의 ‘기억 문화’를 되새기고자 기록을 남겨본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드디어 베를린에 도착했다. 맨 처음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를 방문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남겨진 1.3km 길이의 장벽에 전 세계 예술가들이 자유와 평화의 그림을 그린 곳이다. 가장 대표적인 벽화는 동독과 소련의 지도자가 입을 맞추는 장면을 담은 ‘형제의 키스(My God, Help Me to Survive This Deadly Love)’로, 지금도 냉전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예술가들은 새로운 벽화를 그리며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마치 프라하의 존 레논 벽이 지금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를 새롭게 추가하듯, 여전히 평화와 소통의 상징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슈타지 박물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감시와 억압을 기록한 ‘슈타지 박물관(Stasi Museum)’도 방문했다. 이곳에는 도청 장비, 감시 카메라 등 실제로 사용되었던 장비들과 방대한 양의 감시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당시 시민들의 사생활이 어떻게 침해되었는지 실체를 보여주는 자료들로, 독재와 감시, 그리고 인권 침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박물관은 독일 통일 이후 과거를 기억하고자 세워졌다. 이러한 자료들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깨어있는 시민들’ 덕분이라고 한다. 동독 정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문서 파기를 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슈타지의 여러 지부와 본부를 점령하여 증거들을 보존해냈고, 시민들의 용기로 오늘날 과거사 청산의 중요한 자료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박물관 섬
‘박물관 섬(Museumsinsel)’은 19세기부터 세워졌으나 전쟁 중 파괴된 박물관 5곳이 재건된 세계적인 문화유산지로, 그 앞에는 ‘훔볼트 포럼(Humboldt Forum)’도 자리하고 있다. 포럼은 과거 독일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하에서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고, 그 유산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개방형 플랫폼이다. 통일 이후 독일은 과거 독일제국의 상징을 복원하였지만,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던 제국의 상징을 다시 세웠다는 지적으로 복원에 대한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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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사진 : 정지영)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베를린에 위치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은 나치 독일 시절 학살된 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소로, 약 2,711개의 서로 다른 잿빛 콘크리트 건조물로 조성된 약 5,700평의 공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높낮이가 비슷했지만, 가운데로 갈수록 땅이 낮아져 건조물이 높은 기둥처럼 보였다. 사면이 기둥으로 둘러싸인 기념물의 중앙 부근에서는 방문자들이 방향 상실감과 불안정성을 느끼게 하여, 학살의 비극을 더욱 생생하게 체감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높고 낮은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를 걸으며 시멘트 기념물이 주는 중압감과 혼란을 통해, 독일이 과거의 죄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나치의 만행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현장 수업을 나온 학생들이 낮은 건조물 위에 앉아 토론을 나누고, 어린이들이 건조물 위와 사이에서 뛰어노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여행길잡이님는 건조물 위에 앉거나 올라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이는 우리나라식 사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념물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멀리서 추모하는 것보다, 기념물에 쉽게 다가가 기억을 몸소 체험하여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문화적 통합을 일구어낸 ‘암펠만’ 신호등
건널목에서 ‘암펠만(Ampelmann)’ 신호등을 봤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서독 신호등으로 대체될 수 있었던 동독의 신호등 ‘암펠만’의 사용을 병행함으로써 외형적 정치 통합을 넘어서서 문화적 통합을 일구어낸 것으로 유명한 신호등이다. 이는 서독 문화가 대대적으로 동독에 전파되면서 발생한 동독 시민들의 소외감과 좌절감을 해결하고자 한 사례라고 한다. 남북한과 달리 나름의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당시 동서독도 통일의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동독 전체가 실업과 부채로 몸살을 앓아, 동서독 간의 경제적 격차와 사회적 긴장을 심화시켰다고 한다. 동독 재건과 경제적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에서는 통일세가 도입되었고, 2021년까지 개인과 기업을 대상으로 징수했다고 한다. 독일 통일 30년이 지나서도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 하니, 단절과 소통을 반복하고 있는 70년 분단의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떠올랐다. 통일의 과정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평화통일 프로세스’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사진 : 정지영)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베를린을 떠나기 전에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방문했다. 2020년 베를린 미테구의 모아비트 지역에 있는 브레머 거리와 비르켄 거리 교차로에 설치된 소녀상은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소녀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여성들을 기억하고, 전쟁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설치 직후 일본 정부의 항의와 독일 정부의 철거 명령, 철거 명령 효력 집행 정지 신청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독일 시민들과 한국 교민들의 노력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2024년 9월에 미테 구청에서 소녀상을 잔여물 없이 완전히 철거할 것을 명령하며, 기간 내 철거하지 않을 시 3,000유로(약 44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통지했다는 소식을 재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가 공개했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무반성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암담함을 느꼈고, 독일의 반성과 참회의 태도를 일본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과 관련된 뉴스에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현대사 포럼(사진 : 정지영)
현대사 포럼(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포츠담을 거쳐 라이프치히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현대사 포럼(Forum of Contemporary History Leipzig, Zeitgeschichtliches Forum Leipzig)’이 있었는데, 독일 현대사와 동독 시절의 역사, 그리고 통일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시내 한복판에 있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통일 전후의 역사를 통해 평화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교육의 장으로 잘 활용되고 있었다. 포럼 전시물 중에서 ‘독일은 제2의 한국이 아니다.(Deutschland kein zweites Korea)’라는 표어가 걸린 선거 관련 사진이 있었다. 1950년 10월 15일, 동독에서 최초의 인민회의 선거가 열렸을 때 걸린 것이라고 한다. 남북한의 분단과 전쟁이 큰 문제로 인식되었던 1950년이 떠오르면서, 우리와 독일의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이 떠올라 잠시 머물면서 응시했다.
라이프치히가 동독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이유는, 1989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에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에서 ‘월요 시위’가 열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외치며 민주화를 외쳤던 용감한 시민들의 외침은 처음에는 소규모였으나, 점차 규모가 커져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 달 뒤에는 7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고 한다. 월요 시위는 폭력 없이 이루어진 평화 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로, 동독 정권의 붕괴를 앞당기며 독일 통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국제군사재판소
뉘른베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도시로, 황제의 행렬이 자주 열렸고, 영주들이 황제를 선출하던 역사적 장소였다. 이를 주목한 나치는 뉘른베르크를 나치당 연례 대회의 개최지로 삼았기에, 뉘른베르크는 나치당의 발원지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여행길잡이님는 나치가 공포한 법률도 소개해 주었다. 그중 ‘독일 혈통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법(Blutschutzgesetz)’은 나치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서 제정된 이 법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법적으로 명문화한 인종 차별 정책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대인들은 독일 시민권까지 박탈당했다. 흥미롭게도 나치는 동물 학대를 금지하는 최초의 포괄적 법률도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수준 높은 법이었다고 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인종차별적 정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며, 냉철한 이성보다도 뜨거운 가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의 악행이 시작된 장소이기도 하지만, 정의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은 곳이기도 하다. 나치의 주요 전범들을 대상으로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침략 범죄를 단죄하는 최초의 국제 재판인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열렸다. 나치의 심장에서 그들의 종말을 알리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며, 인류에 대한 범죄의 심각성을 세상에 드러냈다. 또한, 개인의 양심이 국가의 명령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며, 반인도적 범죄를 처벌하는 국제법이 마련되는 재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24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기소되어 12명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승전국이 주도한 재판으로 정치적 고려가 개입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중요한 재판이었다. 반면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은 전쟁 범죄에 대한 단죄와 사후 노력이 부족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기에 급급한 일본의 행태를 보며, 올바른 역사 교육과 반성을 기억과 문화로 해결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에는 박물관도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군사독재 시절 학살과 이에 대한 처리가 소개되어 있었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도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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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군사재판소(사진 : 정지영)
기억의 힘
나는 이번 연수를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기억의 힘’이었다. 반성해야 할 역사를 외면하거나 왜곡하기보다는, 드러내어 기억하고 함께 반성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 만난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배우며 협력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독일의 ‘기억 문화’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1960년대 젊은 세대가 주도한 68혁명은 독일 통일 이후 나치 독재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이어지며, 다시는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기억과 다짐’을 지속해 왔다. 전후 세대들이 전쟁 반대와 민주주의를 기치로 독일 사회 변화를 이끌었는데, 이는 동방정책을 펼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역사적 행보로 연결되었다. 1970년,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유대인 봉기 기념비 헌화식에 참석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묵념하며, 나치 독재가 초래한 피해에 대해 깊은 사과와 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빌리 브란트의 행동은 전 세계에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으며, 화해와 용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단순한 정치인의 행동이 아니라, 독일 사회가 이룩한 반성과 자책이 정치인을 이끈 결과라고 생각한다. 당시 여론 조사에서는 브란트의 행동에 대해 지지와 반대가 팽팽했고,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조금 우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반성의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던 독일이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화해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 사회도 여전히 대립과 갈등이 존재한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도 대결 구도가 여전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올바른 기억과 이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는 동서독 국민들의 기억과 노력 덕분이며, 우리가 분명히 배워야 할 것이다. 많은 독일 시민들의 성숙한 기억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퍼지기를 꿈꿔본다. 마지막으로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희생자의 아픔을 함께 기억하며, 화해하는 문화를 기원한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정지영 |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국어 교사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다방면에 대한 관심과 실행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선생님이 되려고 평화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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