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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27_3 박지연_그을린 사랑

by 어린이어깨동무 2021. 8. 13.

[평화를 담은 영화] 

그을린 사랑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모든 전쟁을 반대한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지연

 

오래된 영화 <그을린 사랑>이 새로운 이유
미얀마의 민주화 항쟁은 코로나 감염까지 겹치며 상황이 더욱 열악해지고 이제 그들은 살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10월에 개최되는 부산평화영화제는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각국에서 벌어진 내전을 돌아보며 이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려 한다. 지금 내전과 제노사이드에 관한 영화들을 정리하며 <그을린 사랑>을 다시 꺼내 본다. 전쟁이 훑고 간 자리에 남겨진 아이와 여성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전쟁을 안고 가야 하는지, 너덜거리는 살점이나 피가 튀는 신체적 잔혹함 없이 전쟁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엔헌장에 ‘제노사이드는 전체든 부분이든 간에,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인종적 집단을 소멸시키려는 의도’라고 명시한다. 원래 1946년 12월 11일 나치 홀로코스트에 대한 대응으로 만든 제노사이드에 대한 정의는 ‘정치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스탈린의 압력에 의해 이 문구는 사라졌다. 그러나 2006년 아르헨티나 연방법원은 군부독재 공포정치 기간에 저질러진 납치, 고문, 살해에 대해서도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다. 정치적 이유로 정당한 절차 없이 물리적 구금이나 생명을 앗는 집단의 행위, 그것이 지금 민주화를 갈망하는 미얀마를 포함한 지구 곳곳 우리 이웃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시선과 아이
라디오헤드(Radiohead)의 "You and Whose Army?"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카메라는 어느 폐가 속에 군인이 고아들의 머리를 깎고 있다. 여기 한 소년, 발목에 세 개의 점을 문신한 소년이 카메라를 노려본다. 어찌할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할 때 우린 눈을 감고 두려움을 피하는데, 소년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응시’한다. 이 시선은 화면을 뚫고 우리와 마주 본다. 화면 속의 부릅뜬 두 눈과 마주한 우리는 가상의 이미지인 영화 속 공간이 아닌, 현실 속 사건으로 초대받는다. 현재와 과거, 사건과 재현이라는 간극을 카메라는 봉합하며 움직인다. 눈을 가려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차라리 눈을 감고 만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시선을 거둔다. 눈을 파헤치며 이 비극을 끝내려 하는데, 오히려 <그을린 사랑>은 한 아이의 ‘응시’를 통해 전쟁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스신화와 수학 문제
엄마 나왈이 돌아가시며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몬에게 두 통의 편지를 남긴다. ‘너희들의 또 다른 형제를 찾아라.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 이 편지를 전달하여라’가 그녀의 유언이다. 오빠와 아버지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남매에게 맡겨진 두 통의 편지를 ‘각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길을 나선 이는 대학에서 ‘콜라츠의 추측’을 강의하는 이론 수학자 잔느이다. 기실 모든 수수께끼의 답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소년의 발꿈치에 새겨진 세 개의 점, 세 개의 이름, 세 개의 존재. 홀수이든 짝수이든 어떤 자연수도 모두 ‘1’로 환원되는 콜라츠의 추측, 1+1=2가 아니고 1+1=1이 되는 이야기, 잔느가 찾아간 델리쉬 대학의 수학교수는 오일러의 공식을 이야기한다. 가장 아름다운 수식이라고 일컫는 오일러 공식은 변수x에 π를 대입하면 간단한 수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에 핵심은 원이다. 처음부터 자기 꼬리를 문 한 마리의 뱀 대가리와도 같은 원이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동일인이라는 강간과 근친상간의 문제를 넘어 피해자와 가해자가 역전되고 물고 물리는 형상이 우리를 덮쳐온다. 게다가 오릴러 또한 눈을 잃어버렸다지 않는가.

전쟁의 비참함을 이야기하며 다루는 여러 방식에서 무너진 개인의 고통, 빈곤과 상흔 대신 감독 드니 빌뇌브는 가장 사적인 ‘가족 찾기’의 수수께끼를 던진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엄마가 지나온 삶이 있고, 거기에 잔느가 개입하며 엄마의 과거를 알아간다. 그리고 오빠의 존재를 확인하고 흔적을 찾아간다. 하지만 전쟁의 시간이 그렇게 순탄할 리가 있겠는가. 이 단순한 수학 공식이 일러주듯이, 명징하고 아름다운 공식도 전쟁의 비극 앞에선 그 결말이 핵폭탄으로 변해버린다.

 

* 사진 영화 <그을린 사랑> 포스터 : 출처 - 네이버 영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각각 10개의 소제목으로 펼쳐지듯 겹치듯 이어져가는 이야기는 연대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시공간이 분리된 두 상이한 세계가, 그리고 상이한 인물들이 끊임없이 공통된 지층을 형성하면서 결국 두 세계의 분리가 결합의 형태로 전환된다. 10개의 막은 수수께끼가 풀리려는 순간 매번 끝이 난다. 끝과 시작점은 서로 유사하여 지나가는 버스, 자가용 안의 인물이, 종려나무 사이로 흐르는 바람을 맞이하는 자가 나왈인지 잔느인지 시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치밀한 사실주의 혹은 다큐적인 색채를 띠면서도 시간도 뭉개지고 데레사도. 델리쉬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도시들이 난무한다. 이 비극은 마치 레바논같기도 하지만, 레바논이지도 않다. 이라크 일수도 혹은 광주이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이거나 미얀마이기도 하다. 어제와 오늘이 엮이고 진실과 거짓이 엉키고 도시의 벽과 감옥의 벽이 만나고 퀘벡의 풍경과 중동의 황량함이 겹친다. 드니 빌뇌브는 의도적으로 도시의 이름과 연도를 지웠다. 그의 전작 <폴리테크닉>에서도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몬트리올 총기 난사 사건을 그렸음에도 이름과 지역을 지움으로써 하나의 사건으로 각인되기보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배경이 중동 어딘가인 듯하지만, 특정 어디이지 않다. 이제 이 전쟁은 우리 모두의 것이 돼버렸다. 모든 공간에 녹아든 기억은 개개인의 것이기도 우리 모두의 것이자 역사와 신화의 기억이기도 하다. 개별적 상황이 아닌 이런 비극이 도처에 생겨나고 있는 보편성으로 환원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을려 재가 되었어도 함께 할 것
나왈이 타고 가던 버스가 송두리째 화염방사기에 타버린다. 이 버스를 얻어타기 위해 목에 걸던 십자가 목걸이도 빼고 스카프를 히잡처럼 둘러 자신이 회교도인 것처럼 꾸몄지만, 살기 위해서 다시 기독교인라고 외치고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버스가 다 타버리고 망연자실 그 죽음을 지켜보던 나왈은 자신이 회교도이건 기독교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기독교인이라면 그 가해를 동조할 수 있을까. 회교도라면 제 아들을 맡긴 고아원이 파괴되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어쩌면 나왈 자신도 하나의 원형처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태워버린 ‘Incendies’는 이렇게 결말을 맞이한다. 하지만 정말 끝은 나왈이 남긴 편지이다. 결국, 전달된 편지에는 나왈이 전한 말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살 수 없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도 함께 한다는 것, 연대하는 것 그것만이 미래일 수 있다. <그을린 사랑>은 가장 비참한 전쟁 영화이지만 또한 그것을 뛰어넘을 희망의 편지를 나왈로부터 받았다. “함께 할 것!”

박지연 | 영화평론가, 부산어린이어깨동무 운영위원이며 부산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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