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평화]
산내 골령골과 여순항쟁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군인과 부당한 명령에 순응한 군인
임재근
제주 4·3항쟁에서 여순항쟁으로...
제주 4·3항쟁은 고립된 제주 섬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1948년 4월 28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과 인민유격대장 김달삼 간의 평화회담이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을 핑계로 파기되었다. 당시 윌리엄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5월 5일 직접 제주도로 가서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제주도지사, 9연대장 김익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등이 참석한 ‘9인 최고 수뇌회의’를 주재했다. 제주도에서 돌아간 다음 날인 5월 6일, 딘 장관은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강경파 박진경 대령을 임명했다. 하지만 제주 4·3항쟁의 여파는 5월 10일 시행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주도 지역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2개의 선거구를 무효로 만들었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실시된 5·10 총선거에서 제주지역 2개의 선거구에서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산된 것이었다. 전국 95.5%의 높은 투표율과 비교해 본다면, 북제주군 갑구 43%, 북제주군 을구 46.5%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에 나섰던 제주도민들의 높은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수치였고,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5·10 총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진압 강도를 더욱 높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강경 진압은 계속되었다. 강경 진압을 위해 육지에서 경찰들이 몇백 명씩 수차례 제주에 증파되었다. 급기야 육지의 군대에까지 증파 명령이 내려졌다. 10월 중순 증파 명령을 받은 부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전남 여수 주둔 제14연대였다. 제14연대는 광주 4연대 1대대를 기간병력으로 1948년 5월 4일 창설되었다. 당시 각 연대는 모병이 마을마다 할당을 통해 이루어지는 등 향토 연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였던 1946년 8월 1일, 제주도는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도제가 시행되었다. 그동안 섬 도(島)로 불리다가 길 도(道)로 승격한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전라남도에 속해 있던 제주도는 여수 14연대 군인들에게는 같은 고향이라는 인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수 14연대 군인들에게 내려진 제주도 출병 명령은 ‘동포를 학살하라’는 명령과도 같았다. 그간 미군정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불만과 제주도 4·3항쟁에 대한 연대의 뜻을 가지고 있던 여수 14연대 군인들은 1948년 10월 19일 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하며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해 봉기에 나섰다. 하지만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여수·순천과 대전의 아픈 인연의 시작, 대전 2연대 진압군으로 투입되다
1948년 10월 19일 밤 봉기한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은 순천, 남원, 곡성, 보성,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봉기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즉각 진압에 나섰다.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했다. 당시 15개 연대 중 대전 2연대를 비롯해 대전 이남에 위치한 전주 3연대, 광주 4연대, 대구 6연대, 군산 12연대, 마산 15연대 등 절반 가까운 부대에서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 대전 주둔 제2연대 일부 병력은 10월 20일 열차로 남원역에 도착해, 트럭에 나눠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제2연대는 순천과 여수를 거치면서 진압 작전에 동참했다. 이 과정에서 제2연대는 진압 작전이라는 미명아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제2연대 부대원들은 순천에서 민간인을 연행한 뒤 북국민학교와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 및 취조했고, 건물 뒤편에서 집단 총살했다. 순천을 거쳐 여수로 진입한 제2연대는 여수에서도 협력자 색출에 주력했다. 제2연대는 여수 사람들을 서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우익 청년단원과 경찰의 협조를 얻어 협력자를 심사한다면서 길게 늘어선 인간 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협력자로 분류하였다. 일명 ‘손가락 총’이다. 협력자로 분류된 사람은 학교 뒤로 끌려가 밭 구덩이에서 총살로 즉결 처형되었다. 일부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은 종산국민학교(현재 여수 중앙초등학교)로 압송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은 오동도, 만성리 등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무기징역, 20년 징역, 5년 징역 등을 선고받은 사람은 대전을 비롯해 전주, 대구, 김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대전에 임시군법재판소 설치 그리고 학살의 시작
여순 사건 과정에서 검거된 민간인 대부분은 현지에 설치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14연대 군인들은 대전까지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군 당국은 1948년 10월 말에 대전지방법원 일부를 활용해 ‘임시군법재판소(임시육군중앙군법회의)’를 설치했다. 군 당국이 대전에 임시군법재판소를 설치한 이유는 검거한 군인들을 열차를 이용해 대규모로 압송할 수 있었고, 대규모 정치범 수감시설인 대전형무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기 이후 한 달 가까이 흐른 시점인 11월 중순에 700여 명의 군인들이 대전으로 압송되어 대전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재판은 11월 6일부터 이틀에 한 번꼴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속한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된 항변과 변론의 여지는 없었다. 특히 당시 국방경비법상 군법회의는 재판을 한 번만 하는 단심제였다. 하지만 그런 국방경비법은 입법기구에서 심의된 적도, 공포된 적도 없는 것을 법률로 속여 수많은 사람을 죽인 초법과 무법의 수단이었다. 1949년 11월 27일, 임시군법재판소 재판장 이지형 중령이 그동안 10차례 군법 재판에 회부된 417명의 재판 결과를 발표했다. 417명 중 사형 선고 224명, 무기징역 110명, 5년 징역 30명, 1년 징역 28명, 보류 1명, 무죄 석방 24명이었다. 사형 선고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고,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심지어 사형집행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사형 언도를 받은 224명 중 대통령의 인준을 받은 55명이 11월 27일 대전 교외 모처에서 총살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전부터 이미 학살은 시작된 것이다. 10월 말부터 대대적인 언론보도로 진압 현황과 재판 소식을 알리던 군 당국은 11월 말을 기점으로 언론보도를 중단했다. 이 때문에 이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전으로 압송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1949년 1월 27일에 작성된 미군 제971 방첩분견대 대전지부의 극비 문서에서도 69명이 사형 집행되었다고 밝히고 있어 이후에도 사형집행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하며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해 봉기에 나섰던 14연대 군인들은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4·3사건으로 제주에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7년 형을 받은 300명의 제주 사람들이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것은 1949년 7월이었다. 대전에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면한 14연대 군인들과 여수와 순천 현지에서 군법 재판을 받았던 민간인들은 이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제주 출병을 거부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사람들보다 먼저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것이다. 14연대 군인들이 봉기하지 않고 제주도 출병에 나섰더라면 제주에서 만났을 운명이, 출병 거부로 대전 감옥에서 만나는 운명으로 뒤바뀐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기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숙군(肅軍) 작업을 강력히 전개했다. 그 결과 5% 정도가 군대에서 축출되었다. 군대 내 숙군 작업에 나선 이승만 정권은 군대 밖에 있던 국민들도 믿지 못하고 불안한 존재로 인식했다. 국가보안법 제정을 서둘러 국민을 처벌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1948년 12월 1일 이후 전국의 감옥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 투옥되기 시작했다. 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정치사상범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 대전형무소 수감자의 절반 정도인 2천 명 정도에 달했다. 법적 장치만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게 불안했던 이승만 정권은 암묵적으로 반대 세력으로 간주한 국민을 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대전형무소 재소자 대부분은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원 중 상당수도 형무소 재소자들과 함께 학살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은 대한민국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서 과거 좌익에 몸담았던 이들을 전향시켜 관리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여기서 보도는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공무원들은 보도연맹 가입 실적을 올리려는 당국의 요구에 공산주의자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까지 무리하게 보도연맹에 가입시켰기에 실제 보도연맹 구성원들은 이념 대결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을 도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경찰과 군인은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집단학살했다.
엇갈린 무덤-
희생자는 땅속 긴 구덩이 속에...
가해자는 국립묘지에..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정권 유지에 정적이 될만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감옥 밖에서는 국민보도연맹으로 조직해 관리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는커녕 국민을 학살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몰두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들은 대전형무소에서 9km가량 떨어진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총살당한 후 암매장되었다. 학살당한 규모가 너무나 커 암매장된 구덩이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한다 하여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 암매장된 유해들은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빗물에 쓸려나가고, 도로 공사 과정에서 손실되고, 경작지로 사용되면서도 훼손되었다. 그러다가 2020년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이 시작되어 수습되기 시작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학살당 한 지 70여 년 만에 차갑고 어두운 구덩이에서 벗어나 볕을 보게 된 것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14연대 소속 헌병이었던 박정환(당시 35세)은 휴가 나왔다가 봉기 사실을 모른 채 부대로 복귀하던 중 광주 시내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었고, 그 후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역시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산내 골령골에서 총살당했다. 그의 딸 박귀덕(1941년 생)은 남은 생이라도 아버지가 묻힌 곳 가까이에서 지내겠다며 대전으로 이사와 살고 있다. 박귀덕은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이 한창이던 지난 2020년 발굴 현장을 지켜보다 구덩이 속에서 처참하게 드러난 유해들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 지었다.
여수 주둔 14연대가 봉기한 뒤 여수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식량 배급과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동 세력 처단 등의 활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 청년단장 등이 인민위원회에 의해 죽임당하기도 했다. 이때 여수의 유명한 자본가였던 천일고무공장 사장 김영준도 처형되었다. 인민위원회가 김영준을 처형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과거 친일 전력과 우익활동이었다. 김영준은 일제강점기 사상범의 보호관찰 업무를 담당하던 촉탁보호사 활동과 군용기 구입비 및 국방금품 헌납 등 친일 활동에 앞장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그런 그는 인민위원회에 처형당했다는 이유로 애국단원 신분으로 대전현충원 경찰묘역(경찰2-511-2384)에 안장되어 있다. 묘비에는 ‘전사’로 표기되어 있지만, 김영준은 당시 50살로 경찰이 아니었고, 전투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여순사건 과정에서 발생한 서로 다른 죽음이 엇갈린 무덤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또한 여순사건 당시 여수와 순천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송석하도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제1묘역-93)에 안장되어 있다.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은 여순사건 당시 여수지구계엄사령관을 맡으면서 여수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지휘 책임을 갖게 되었다. 송석하는 1955년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해 사후에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송석하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고,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어,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국립묘지 안장 자격에 논란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에는 “군인은 국군의 사명인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의무를 수행하고,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여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의무 규정을 두고 있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은 동포를 학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군인과 국민을 학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따른 군인 중에서 진정으로 군인의 의무를 다한 이들은 어느 쪽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임재근 |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사무처장 겸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다. KAIST 산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이후 통일운동과 통일교육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해 북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논문으로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와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가 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영동 노근리 등 평화기행 해설에 나서고 있다. 2021년부터 공주대학교에서 ‘북한의 이해’, ‘한반도 평화와 쟁점’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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