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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2_6 주예지_포근한 스웨터. 곶감. 살랑살랑

by 어린이어깨동무 2022. 11. 18.

[좌충우돌 교실 이야기 2] 

포근한 스웨터. 곶감. 살랑살랑

주예지

 

가을 단어들
                                       박하은

가을이 왔다.
단풍. 겨울의 시작. 옥수수. 도토리
아직 남은 여름의 싱그러움.
가장 기분 좋은 계절
은행나무. 떨어진 은행들. 예쁜 노을
포근한 스웨터. 곶감. 살랑살랑
달!
머릿속에 가득 가을다운
나뭇잎을 밟아보자.
단풍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느껴보자.
맞아보자. 뭉개보자!

 

가을이 왔다.
이토록 설레는 첫 문장이라니.
시험 기간에 지친 아이들을 위해 쉬어가는 시간으로 황인숙의 <말의 힘>이라는 시를 패러디하는 활동을 했더니, 한 아이가 가을 내내 두고두고 읽고 싶은 시를 선물해 줬다. 포근한 스웨터. 곶감. 살랑살랑. 자꾸 소리 내어 말하고 듣고 싶은 구절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 바람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9월 20일 세계평화의 날을 맞아 일주일 간 도서관에서 <PEACE IS HERE> 평화 북 큐레이션1)을 진행했다. 이전부터 평화작은도서관을 소소하게 운영해보고 싶었는데, 올해 도서관에서 여러 주제로 북 큐레이션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냉큼 사서 선생님께 연락드렸다. 동아리 아이들과 함께 평화 관련 책 전시 및 사진전, 간단히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 행사를 준비했다.

1)북(Book)과 큐레이션(Curation)의 합성어인 '북큐레이션'은 특정한 주제에 맞는 여러 책을 선별해 독자에게 제안하는 것을 말하는 신조어이다.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PEACE IS HERE

책 전시

‘평화란?/한반도 평화/평화 열전/우리도 세계시민’이라는 소주제로 나누어 책을 전시했다. 동아리 학생들이 책을 미리 읽고 쓴 추천사나 주제와 관련된 카드뉴스 등을 제작하여 크롬북을 활용해 함께 나누었다. 터치해서 직접 화면을 넘겨볼 수 있는 크롬북이 유용했다.

 

한반도 파노라마 사진전

‘사진으로 보는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한 사진전이다. 사진전을 하면 어떻겠냐고 슬쩍 아이들에게 던졌더니, ‘파노라마’라는 그럴듯한 컨셉을 잡아왔다. 판문점 등과 같이 남북이 걸어온 길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전시했다. 파노라마 형태로 전시하여 남북관계의 역사와 교류 협력의 길을 따라가며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관련된 시를 찾아 시화도 함께 전시했다.

 

이벤트 행사

책 전시와 사진전 관람 이후에 도서관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활동을 준비했다. 전시된 책에서 쪽지에 적힌 해당 구절을 찾아 빈칸을 완성하기, 카드뉴스를 보고 관련 내용으로 퀴즈 맞히기, 사진전 관람 후 소감을 작성하기 활동을 동아리 학생들이 진행했다. 상품으로 내건 초콜렛의 위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같은 기간에 도서부에서 가을 행사도 같이 하는 터라 도서관이 아이들로 빽빽했다. 진행을 맡은 동아리의 어떤 아이는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나보다 더 빨리 도서관에 도착해서 준비를 했다. 동아리원이 아닌 어떤 아이는 행사 진행 기간 내내 와서 진행을 도왔다. 어떤 아이는 도서관에 처음 와 본다며 곁으로 조용히 와서 귀여운 자랑을 했다. 어떤 아이는 학교에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한 곳에 모인 걸 처음 본다며 놀라워했다. 구경 오신 한 선생님은 ‘인산인해’라는 말의 뜻을 느끼고 간다고 말씀하시며 따뜻한 격려를 해주셨다. 학생자치회의 부장인 어떤 아이는 자기들도 행사를 하고 싶다면서 열의에 가득 찼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학생자치회 담당 선생님께서는 평화의 물결이 여기까지 왔다면서 나에게 은근한 말을 건넸다. 일거리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들었지만 부디 잔잔한 물결이기를 바라본다.


사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안 해도 될 일을 벌여서 또 사서 고생이구나.’하고 후회를 했다. 이전에 학생자치회에서 진행했던 행사들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만만히 본 것도 사실이다. 담임을 맡으면서 그 외의 시간을 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더군다나 올해 동아리 아이들은 행사 기획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일단 저지르고 본다. 아이들과 소통하고, 도서관을 꾸미고, 물품과 간식을 사러 가는 발걸음이 바쁘다. 아이들을 기어코 닦달하고야 만다. 최대의 난제. 평화교육을 평화롭게 할 수는 없을까?

 

도서관에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의 어깨 사이로 바람이 분다.
마스크 위로 동그랗게 뜬 눈빛 사이로 바람이 분다.
점심식사 후 달달한 초콜렛을 주고받는 손 사이로 바람이 분다.

 

마치 포근한 스웨터. 곶감. 살랑살랑의 모양으로.(대체 그 모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먼곳을 보며 그저 웃지요.)


그 바람이 너와 나 사이로 닿을 수 있다면. 그 사이로 너와 나 모두 느낄 수 있는 바람이 우리에게도 불어오기를. 언제고 불어닥칠 수 있는 시린 바람 속에서도 손을 건네어 잡을 수 있도록.

 

주예지 ㅣ 국어가 어렵다는 아이들의 투정 어린 원성에 나도 어렵다며 유치한 설전을 벌이며 지내는 국어교사입니다. 살아있는 국어 수업을 꿈꾸지만 여전히 길을 못 찾고 주변을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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