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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2_4 임재근_볕으로 나온 뼈들이 말을 한다

by 어린이어깨동무 2022. 11. 18.

[기억과 평화] 

볕으로 나온 뼈들이 말을 한다

-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유해 발굴 이야기

임재근

 

표정.. 땅속 뼈들이 말하고 있다


표정은 마음속 감정이나 정서 등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을 말한다. 표정은 입술이나 주름 등 피부를 통해 만들어 낸다. 그런데 피와 살이 흙 속으로 되돌아가고 단단한 뼈들마저 삭아 버렸지만, 산내 골령골의 차갑고 어두운 땅 속에서 흙을 뚫고 나온 두개골을 보고 있노라면 표정이 느껴진다. 고통스런 표정 또는 분노하는 표정이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20여 일간 법적 절차 없이 충남지구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최소 1,800명 이상, 최대 7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당해 암매장된 비극의 현장이다. 9·28수복 이후에도 부역 혐의를 받은 이들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학살이 이어졌다. 이들 대부분은 총살당했다. 발굴된 유해 중에서 작은 구멍이 뚫린 두개골은 총알이 가까이서 발사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근접사살 또는 확인사살의 간접 증거가 된다. 턱뼈에서 쏟아져 내려 뿔뿔이 흩어진 치아 중에는 뿌리가 다 자라지 않은 것들도 발견된다. 사람의 치아는 보통 17~18세까지 자라면서 뿌리까지 자라는데, 뿌리가 없는 치아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미성년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주4.3사건 관련자 중에 미성년자들도 수감되었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청소년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골반 뼈를 통해서는 성별을 가늠할 수 있다. 지난 2020년 유해 발굴 과정에서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골반 뼈가 발굴되었다. 남녀노소가 희생됐다는 증언이 있었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지난 2010년 조사보고서를 통해 여성 희생자 2명의 신원을 밝혀낸 바 있다. 발굴된 골반 뼈만으로 희생자의 신원을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DNA 감식을 통해 여성의 유해임은 확증해냈다. 여성 희생자의 존재를 유해를 통해 확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속에서 드려난 뼈 밭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유해발굴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 2007년이었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골짜기를 따라 5개의 작은 지점을 대상으로 유해발굴을 시도했다. 그 중 2곳에서만 유해 발굴에 성공했다. 한 군데에서 29구, 다른 한 곳에서 5구의 유해를 발굴해 총 34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이때는 대규모로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발굴을 진행하지 못했다. 매장 추정지가 사유지다보니 토지 소유주들이 유해발굴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유해 발굴 작업도 멈춰 섰다. 다급한 것은 유족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땅 속 유해들은 계속 삭아 버리고, 대규모 유해 매장지에서는 여전히 경작 활동이 진행되면서 유해들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못한 유족들과 민간단체들이 토지소유주를 설득해 2015년 2월에 대규모 유해매장지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때 일주일 만에 20여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하지만 파내려간 구덩이 벽면에 유해들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더 이상 발굴을 진행할 수 없었다. 민간이 발굴을 감당해 낼 규모가 아니었었을 뿐만 아니라 유해 발굴은 민간에서 진행할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였던 국가가 학살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유해발굴도 맡아야하기 때문에 파 내려간 구덩이를 다시 덮고 국가 차원의 유해발굴을 촉구했다. 결국 5년이 지나서야 국가차원의 유해발굴이 진행되었다. 덮었던 구덩이를 다시 파내어 그 주변으로 234구의 유해를 2020년에 수습했다. 2021년에는 962구를, 2022년도 100여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대규모 유해매장지에서 3년간 100m구간에서 1,300여 구의 유해를 수습한 것이다. 매장 밀집도가 매우 높았다. 오랜 세월 습한 땅 속에서 매장되어 있다 보니 대부분의 뼈는 삭아 없어졌고, 단단한 다리뼈들만 뒤엉켜 있었다. 말 그대로 뼈 밭이었다. 2020년 이전에 발굴된 유해까지 포함하면 1,350구에 달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는 세종추모의집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다. 지난 2016년에 전국단위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위령 시설’을 산내 골령골에 조성하기로 결정하면서 향후 시설이 완공되면 산내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수습된 유해까지 산내 골령골로 옮겨올 예정이다.

 

 

유해발굴의 의미


지금까지 진행된 총 5차례의 유해 발굴 중, 2015년을 제외하고는 국가 차원으로 발굴이 진행되었다. 가해세력이었던 국가가 유해발굴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모순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국가에 의해 유해가 발굴되고, 국가의 의례를 통해 수습될 때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은 공식화된다. 따라서 유해발굴의 책임과 의무는 민간이 아닌 국가가 맡아야 한다. 또한, 유해발굴은 당시에는 다하지 못한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동시에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유해발굴은 또한 가해세력에 대한 정보를 확증해준다. 유해와 함께 다수의 탄피와 탄두도 발굴된다. 가장 많이 출토된 탄피는 M1 개런드다. M1 개런드는 당시 군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총기다. M1 카빈 소총 탄피도 출토되는데, 카빈 소총은 개런드에 비해 가벼워 당시 경찰들이 주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군인과 경찰이 가해세력이고, 그중에서 군인들의 개입 정도가 더 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증언과 사건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45구경 권총의 탄피도 간혹 출토되는데 당시 지휘관들이 위협사격이나 확인사살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총을 발사한 곳에서 떨어지는 탄피가 유해들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것은 근접 사살과 확인사살의 증거가 된다.


유해발굴은 유해들이 현장에서 이탈하여 장소적 상징성이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유해발굴이 끝난 장소는 다시 흙으로 덮게 된다. 역설적이게 유해 발굴은 사건 현장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유가족들은 DNA 검사를 통해 유해의 정확한 신원을 밝혀 자신의 가족을 찾기를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70여 년의 세월 속에 땅속에서 대부분 삭아 없어진 유해로부터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전 산내 골령골의 경우는 희생 규모가 워낙 크고, 유해들이 뒤엉켜 있을 뿐만 아니라 희생자들이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어 DNA 검사를 통해 신원확인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신원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DNA 검사를 진행해 데이터를 축적해 놓을 필요는 있다.

 

 

발굴된 유해의 수가 말하는 것


지금까지 산내 골령골에서 수습된 유해는 1,350구에 달한다. 이 수치는 최대 7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수와는 큰 격차를 보인다. 이 때문에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된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규모를 특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골령골 학살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했던 ‘데일리 워커’의 위닝턴은 7천명이 학살되었다고 밝혔고, 비슷한 시기의 해방일보 김남천의 기사와 로동신문 김사량의 기사에서도 7천명이 언급되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즈(Bob E, Edwards) 중령이 작성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보고서에는 1,800명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7월 첫째 주 3일 동안에 처형된 인원’이기 때문에, 전체 희생된 인원은 1,800명보다는 훨씬 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1950년 6월경 대전형무소 재소자는 4,000명에 달했고, 그중 절반 정도가 정치범이었다. 청주와 공주 등 인근 형무소 재소자들도 대전으로 끌려와 학살당했고, 대전과 인근의 국민보도연맹원들도 상당수 희생당했다.


지난 2010년에 발간된 진실화해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에서도 군・경에 의한 피학살자 수가 1차 1,400명, 2차 1,800명, 3차 1,700명 또는 3,700명으로 추정되며, 모두 합하면 4,900명 또는 6,900명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보고서에 “1950년 7월 첫째 주 3일 동안 1,800여 명의 대전의 정치범들이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가장 직접적으로 희생규모를 보여주고 있다며 피학살자 수는 최소 1,8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만 밝히고 있다. 이때 보고서에 수록된 희생자 명단도 500여 명에 불과하다.


발굴된 유해의 규모만으로 희생규모를 단정할 수는 없다. 사건 발생 후 60여년 만에 처음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 기다림의 세월 동안 수많은 유해들이 홍수에 쓸려나갔고, 유해 매장지 위에서 경작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유해들이 훼손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골짜기를 따라 도로가 확장되면서 많은 유해들이 나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증언이 있으나 아직까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발굴된 유해가 희생자 전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발굴된 1,350구라는 수치만으로도 단일 지역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다. 또한 지금까지 신원이 밝혀진 500여명에 비해 더 많은 유해가 발굴되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아직 발굴해내지 못한 유해가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보고 추가 발굴을 지속하는 것과 적극적인 조사를 통해 희생자들의 신원을 추가로 밝혀내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과거 전쟁 시기 국가가 저지른 자국민에 대한 학살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그 결실로 국민에게 잃었던 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임재근 |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사무처장 겸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다. KAIST 산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이후 통일운동과 통일교육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해 북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논문으로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와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가 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영동 노근리 등 평화기행 해설에 나서고 있다. 2021년부터 공주대학교에서 ‘북한의 이해’, ‘한반도 평화와 쟁점’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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