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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2_3 데이빗 벤바우_ DMZ 여름밤의 기억

by 어린이어깨동무 2022. 11. 18.

[여우굴에서 온 편지] 

DMZ 여름밤의 기억

데이빗 벤바우

 

어느 봄날 밤, 내가 여섯인가 일곱 살이었을 때 밤에 자다가 깬 적이 있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2층 침실 창문을 통해 어두운 뒤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심어진 노란색 개나리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결에 그림자들이 춤을 추었다. 갑자기 무서워서 아버지를 불렀고, 잠옷 바람으로 오신 아버지는 창가에 앉으셨다.


“아빠, 뒤뜰에 사람들이 있어요. 울타리 옆을 걸으면서 얘기하는 게 보이세요?” 내 말에 아버지는 “그냥 개나리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거야.” 하고 대답하셨지만, 나는 “깜깜한 밤이 무서워요.”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낮에 뜰에 없었던 것은 저녁에도 없어.”라고 안심시켰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놓여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이 들었다. 아버지가 어두움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해 주신 그날의 충고는 어린 시절 내게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날 저녁으로부터 15년이 지나 한국의 비무장지대에서 야간 잠복 경계를 섰을 때 아버지의 충고에도 예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번에 할 이야기는 내가 DMZ에서 직접 겪은 것이다.


우리는 저녁 6시 무렵 목조 소형 망루에 도착했다. 그날 밤 나와 함께 근무를 설 카투사는 영어를 못했고 나는 한국어를 몰랐다. ‘오늘 밤은 길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M-14 소총에 탄알을 장전하고, 잠금쇠를 돌렸다. 망루에 들어가 클레이모어 격발기를 전선에 연결했다. 유사시에 격발기를 연속적으로 쥐었다 펴면 강철 알갱이들이 발사된다. 전방 35미터 안에는 아무것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오후에 캠프 우즈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받아온 소총과 탄약, 야광탄과 수류탄도 있었다.


2.5톤 트럭이 철책 통문을 지나 하차 지점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방충제를 목, 귀, 얼굴 그리고 손과 팔에 발랐다. 7월의 후덥지근한 저녁이라 소매를 걷어 올렸다. 망루는 3미터 높이의 철책선에서 남쪽으로 약 20미터 거리에 땅에서 약 60센티미터 높이로 설치됐다. 보통은 여우굴을 파는데 근처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모기들의 천국이 되지 말라고 그렇게 했다.


망루에 설치된 통신기는 후방 1.5킬로미터 떨어진 산등성이의 마지(Mazie) OP(감시초소)로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지 OP를 통하면 우리 찰리 소대가 경비를 맡은 지역 총 10곳의 여우굴과 감시초소에 연결된다. 여우굴 사이의 간격은 채 50미터가 안 됐다. 망루는 나무 기둥에 함석지붕을 하고 있었는데 바닥에서 1미터 20센티미터 높이까지 사방을 모래주머니로 쌓았고, 나머지 공간은 열려 있었다. 비 정도는 막겠지만, 누가 총을 쏘면 모래주머니를 거뜬히 뚫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맞출 것이고, 오늘 밤 그 사람은 나와 카투사가 될 것이다.


망루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비무장지대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벌레들이 울고 개구리들이 개골개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망루 뒤쪽 습지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모기들이 극성이었다. 우리 뒤쪽에는 어린나무가 몇 그루 있었고 키가 큰 풀이 자라고 있었다. 망루와 철책선 사이에 있는 나뭇잎들은 수동 분무제로 뿌린 화학 약품 탓에 대부분 말라 죽어서 내가 한국에 있는 내내 다시 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일까? 그 덕에 북한 군인들이 후방 풀숲에 숨지 못할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북한의 대형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보통은 저녁 10시나 11시쯤에나 시작됐는데 오늘은 좀 일찍이다.


군복 바지에 셔츠를 입고 그 위에 방탄복을 걸치고, 머리에는 헬멧을 쓰고 있어서 후덥지근했다. 시내에서 산 비옷도 가지고 왔는데 판초 우의 안에 위장 색 면감을 댄 것이었다. 비옷에 달린 모자는 날이 추워지면 내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것이다. 카투사는 전투식량 C-레이션 한 상자와 물 한 통을 가져왔고, 내게는 식당에서 가져온 치즈 크래커와 사과가 있었다. 어머니가 보내준 풍선껌과 날이 완전히 밝으면 피울 담배와 종이 성냥도 있었다. 포도 맛 쿨레이드가 가득 담긴 통과 허쉬 초콜릿도 하나 있어서 든든했다.


저녁 11시 무렵 개구리와 벌레들이 우는 소리에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새가 울더니 통신기가 울렸다. 마지 OP의 델머 헨슨이었다. 내 위치의 철책 북쪽 지역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거였다. 철책선에는 1미터 50센티미터 높이에 디젤 연료를 채운 통들에 불을 붙여 달아놓았는데 이론상으로는 적군을 볼 수 있게 도와야 했지만, 실제는 시야를 가로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사슴일 겁니다.” 그러나 헨슨의 대답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만약 사슴이라면 한 마리가 온 게 아니라 떼로 지어 왔을 거야. 감지기가 지금 난리야.” 철책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 없었다. 개구리와 귀뚜라미는 여전히 울어댔다. 한 시간이 흐른 자정 무렵 헨슨은 다시 통신을 걸어 OP에 있는 야간 투시경으로 보니까 남쪽에 있는 나무 옆에 한 사람이 총을 들고 있는 윤곽선이 보인단다. 여기서는 남쪽에 있다는 나무는 물론이고 그 옆에 있다는 녀석도 볼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때 통신기가 다시 울렸다. 우리 망루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여우굴에 있던 프리벳이었다. 자기는 그 사람이 보이니 총을 쏘게 해 달란다. 야간 투시경이 없는 프리벳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어 쏘지 말라고 응수했다. 내 쪽으로 총알이 날아오면 안 된다. 게다가 언덕 위에 있는 부사관 클럽이 프리벳의 총구 방향에 있다.


새는 계속 울어댔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금속이 쨍그랑거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개구리나 귀뚜라미 같은 벌레들은 금속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밴드를 결성했으면 몰라도. 쨍그랑 소리가 다시 들렸다. 철책 근처에서 나는 소리인 게 분명했다. 4초에서 6초 간격으로 소리는 계속됐다. 나는 양손을 귀에 대고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서 소리가 나오는 곳을 찾으려고 했지만, 소리는 너무 희미했다. 소리가 다시 들렸을 때 나는 M-14 소총으로 철책 하단부를 향해 발포했다. 땡그랑 소리가 그쳤다. 귀에는 총성의 여운이 울렸다.


통신기가 다시 울렸다. 마지 OP의 장교였다. 나는 철책 근처에서 사람 하나를 봤다고 보고했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교는 내가 그 사람을 맞추었는지 물었지만, 나는 사실대로 모르겠다고 보고했다. 카투사에게 내가 남쪽을 경계할 테니 너는 북쪽을 살피라고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문득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개구리나 벌레도 울지 않았다. 삼십 분쯤 후에 통신기가 울렸고 OP에서는 기동타격대가 철책선 북쪽을 수색하러 온다고 했다. 잠시 후 삼사백 미터 남쪽에서 궤도 차량의 디젤 엔진이 작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카투사에게 기동타격대 GI들이 ISO를 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미군이 수색한다는 뜻이었다. 철책선 쪽을 가리키며 “G.I.(미군) ISO(수색), G.I. ISO”라고 말했다. 바로 그때 우리 망루와 서쪽 언덕에 있는 여우굴 사이에서 수류탄 하나가 터졌다. 나는 OP에 통신을 넣어 서쪽 여우굴에 연결한 다음 거기에서 수류탄을 던졌는지 물었다. 하지만 자기는 오히려 내가 던질 줄 알았다고 했다.


궤도 차량이 가까이 오고 있었고, 카투사는 망루에서 북쪽으로 난 공간으로 M-14 소총을 철책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나는 우리 뒤쪽으로 캄캄한 남쪽을 바라봤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속절없이 동요하고 있던 터였다. 심장 박동 소리가 커졌고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만 계속 맴돌았다. 궤도 차량의 엔진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멈췄다. 나는 그곳이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통문이었으며 여섯에서 여덟 명의 기동 타격대원들이 궤도 차량에서 내려 통문을 지나 철책선의 북쪽 지역을 일렬 지어 수색에 들어간 것인 줄 알았다.


나는 다시 카투사에게 말했다. “G.I, ISO. G.I, ISO.” 기동타격대가 우리가 있는 지역의 철책선 북쪽 좌우의 풀과 덤불 사이를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남쪽을 응시했다. 그때 카투사가 갑자기 기동타격대가 있는 쪽으로 향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총 개머리판을 돌려 카투사의 총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그 충격으로 카투사의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GI, GI!” 카투사에게 외치고 기동타격대에 소리쳤다. “미안합니다. 여기 카투사가 총을 쐈지만, 이제 무장해제입니다!”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어둠 속의 수색은 우리 지역을 벗어나 계속되었다. 삼십 분이 지나 수색이 완료되어 기동타격대가 비무장지대를 떠나 궤도 차량을 타고 복귀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은 다시 조용해졌고 개구리와 벌레들이 밤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새들은 그날 밤 다시 울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 새벽 2시가 되었을 때 망루 남쪽 습지대에서 천천히 우리 쪽으로 철벅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 나는 쪽으로 쏘아야 할까? 기다릴까? 다시 들어볼까? 멈추라고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가 누구이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있는 망루는 철책선에 달린 등불 탓에 환히 잘 보였다. 나는 소리쳤다. “멈춰!” “누구인가?” 철벅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조용했다. 난 다시 소리쳤다. “GI, 누구인지 밝혀라. 아니면 쏘겠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 우리야. 레이 중위. 존스 병장.”


서서히 동이 트면서 떨리던 몸이 천천히 안정되면서 평온이 찾아왔다. 사방이 완전히 밝아졌을 때 나는 M-14를 들고 망루를 나섰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카투사가 확실히 볼 수 있도록 했다. 철책선을 따라 걷다 보니까 철책 건너편에 약 60센티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보였다. 구덩이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분명 누군가 여기에 있었다. 구덩이 옆의 흙은 촉촉해 보였고, 주변의 풀들은 누가 밟았는지 누워있었다. 뒤로 돌아 망루 남쪽으로 30미터 걸어가니까 누군가 옆에 서 있었다던 어린나무가 보였는데 키가 한 삼 미터쯤 돼 보였다. 나무 옆의 풀들도 누워있었다.

삽화: 그리지영

나는 망루도 돌아가 OP에 통신을 넣어 구덩이에 관해 보고했다. 한 시간쯤 후에 전투 장교와 운전병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보여준 구덩이를 본 장교는 “제군들, 수고했다.”라고 말했다. 그게 다였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누군가 남쪽으로 오려고 했는지, 아니면 북쪽으로 가려고 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때 내가 다르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지난 오십 년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다. 그때 내가 죽지 않았고 중위와 병장을 쏘지 않은 일은 다행이다. 상황상 내 잘못은 아니었겠지만, 후회는 했을 거다. 요란한 발걸음 소리 때문에 나는 그게 우리 군이라는 걸 알았다. 북한군 특공대는 조용히 걷는다. 카투사가 기동타격대를 쏘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그랬다면 그건 미군들이 수색하러 오고 있다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을 거다. 수류탄이 우리 망루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천만다행이다. 그랬다면 우린 끝장이었을 거다. 그 순간도 자주 생각한다. ‘망루 밖으로 뛰어내려야 했을까?’ ‘합판으로 된 바닥을 발로 차면서 오 주여! 라고 외쳐야 했나?’ 북한군들이 우리 망루를 향해 사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근처 여우굴에 있던 동료들이 그들을 사살했을 거다. 프리벳에게 기관총으로 쏘라고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부사관 클럽은 어떻게 되고? 아마도 나는 그때 망루를 빠져나와 낮은 포복으로 금속음이 들리는 철책선에 다가가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나는 죽었을 거다. 아니면 망루에 있는 클레이모어를 모두 발사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밤 일을 수도 없이 생각하며 후회하고 그때로 다시 돌아갔으면 하고 바라지만 삶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최근에 그때 비무장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찰리 소대 전우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했던 조치와 하지 않았던 조치를 지금도 후회하고 있으며 최소한 내가 사격했을 때 그 친구가 놀라 줄행랑을 쳤다면 그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전우들은 아마 지금 이 시각 북한에서는 한 북한군 노장이 손주들에게 자기가 한밤에 비무장지대에 침입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때 미군이 총을 쐈는데 자신은 총알을 피해 미군 기동타격대가 오기 전에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왔다는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을 거라는 말이다. 아마 그럴 거다.

 

데이빗 벤바우 | 1968년부터 16개월 동안 한반도 DMZ에서 미군 보병으로 복무한 미국인.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곱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의 추억과 아픔이 담긴 DMZ에서의 기억을 한국의 시민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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