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이슈]
‘사죄’에 대하여
김영환
“동은아, 고등학교 때 네가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은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파.”
지워지지 않는 학교 폭력의 상처와 피해자의 끈질긴 복수를 다룬 화제작 ‘더 글로리’의 한 장면을 상상해 본다. 가해자인 연진이가 피해자인 동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동은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연진이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았다며 처절한 복수를 멈추었을까?
지난 5월 7일 한국을 찾은 기시다 총리의 입에 비상한 관심이 쏟아졌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 정부가 그토록 목매어 기대하는 ‘성의 있는 호응’을 밝힐 것인가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3월 6일 발표된 조치에 대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분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어주신 데 대해 감동했습니다. 저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
여기서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3월 6일 발표된 조치’는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한국 정부가 가해 기업의 배상금이 아닌 기부금을 대신 지급하겠다고 발표한 ‘제3자 변제안’을 말한다. 기시다 총리는 많은 분이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신 것에 ‘개인으로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입에 쏠린 지대한 관심에 무척 긴장한 듯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갔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의 발언을 뜯어보면 ‘당시’가 언제인지, ‘많은 분’은 어느 나라 누구인지, ‘혹독한 환경’이란 어떠한 환경을 말하는지,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란 무슨 일을 말하는지, 그렇다면 왜 ‘많은 분’이 그런 일을 겪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1940년대에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몇몇 시설에서 수많은 조선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되어 가혹한 상태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
2015년 7월 군함도를 비롯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등재 결정 당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일본 유네스코 대사는 식민지 시기 일본 정부가 국가정책으로 시행한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을 인정했다. 강제동원의 사실인정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이 하루 미뤄지는 이례적인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치열한 협상 끝에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센터 설치 등의 적절한 후속 조치를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그런데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유네스코 등재가 결정되자마자 일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forced to work”가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전쟁 시기 한반도 출신자의 징용은 국제법상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센터 설치를 약속했지만, 도쿄에 설치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2021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본 정부에 이례적으로 ‘강력한 유감’을 표하고 약속의 이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러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도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의 역사를 숨기려 하고 있다.
그런데 2015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결정 직후 강제노동을 부인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기시다 총리(당시 외무상)이다. 그는 총리가 된 뒤에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한국의 거센 비판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강제동원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은 명 확하다. 따라서 그가 밝힌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라는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은 역사부정론으로 일관한 아베 정권의 그것임이 분명하다.
가해자 일본 정부는 사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인 한국 정부는 사죄를 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이 얘기를 꺼내거나 요구한 바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줘서 감사하다.”라며 기시다 총리의 발언에 반색하며 화답했다.
우리는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한미정상회담, 두 차례의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처참한 역사인식을 확인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부인하고,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더 이상의 사죄는 필요 없다며 너무나 당당히 말하는 윤석열 정부의 태도에서 역사에 대한 오만함마저 읽을 수 있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피해자들이 평생 싸워서 얻어낸 대법원판결은 윤석열 대통령이 ‘용기 있는 결단’으로 치장하며 덮어서도 안 되고 덮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판결은 국가가 돌보지 않은 피해자들이 존엄과 인권의 회복을 위한 투쟁으로 맺은 결실이다. 또한, 동아시아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얼룩진 과거를 극복하고자 수십 년 동안 피해자들과 함께 만들어낸 역사이기 때문이다.
2005년 유엔총회는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의 피해자 구제와 배상에 대한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을 채택했다. 이에 따르면 피해자에 대한 배상에는 ‘사실의 인정과 책임의 승인을 포함한 공식적 사죄’, ‘피해자에 대한 기념과 추모’, ‘모든 수준의 교육에서 위반행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
왜 피해자들이 그토록 가해자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의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는지 아는가? 수십 번 사죄했으니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는 윤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 묻고 싶다. 대통령은 ‘자유, 인권, 법치’를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로 들었다.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사죄를 요구하는 이유는 가 해자로부터 진정한 사죄를 받아야만 비로소 피해자가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죄의 증거로서의 배상,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이루어졌을 때야 그 사죄는 비로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진실규명, 사죄, 배상, 책임자처벌, 재발 방지 등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한 과정은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피해자,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피해자에게도 한국 정부가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보편적인 과제이다.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간 존엄과 인권 회복의 역사를 일본에 넘겨주고 ‘한미일 군사협력’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우리는 북녘 동포를 ‘적’으로 삼아 군사력으로 위협하는 한미일 군사협력이 동아시아에 전쟁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통한 과거의 극복, 그리고 평화를 실현하고자 오랫동안 연대해온 동아시아 시민들과 다시 손을 잡는 일이다.
김영환 |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운영위원장. 동아시아공동워크숍,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평화박물관에서 평화운동을 했다. 동아시아 시민들이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 이곳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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