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읽는 나의 평화감수성]
나도 5·18 피해자입니다
김경민
5・18 최루증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아홉 해 째 되는 날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봄날의 풍경은 어제와 다름없는데, 아니 잔뜩 흐렸던 어제보다 더 화창한데, 마음은 더 무겁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날 할 수업을 준비하려고 펼쳐 든 소설은 하필 더 무거운 내용이다. 수업이 4·16 다음날인 것을 알고 선정한 텍스트이기에 ‘하필’이라기보다는 ‘마침’이 더 어울리겠다. 소설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세월호를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몰:mall:沒⎦, 그리고 그 소설이 실린 소설집 제목은 『기억하는 소설』.
5·18에 관한 글을 쓰려고 앉아 4·16을 떠올린 것은 단지 오늘이 4월 16일이어서만은 아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 4·16과 5·18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일어난 그날 즈음이면 몸과 마음이 이상해진다는 점에서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이렇게 편하게 지내도 되는지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진다. 때로는 눈물이 날 만큼 분노와 공포의 감정이 일 때도 있다. 얼마 전, 4·3 추모식 뉴스에서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이들이 추모 행사를 방해하는 것을 봤을 때, 순간 몸이 떨리면서 눈물이 왈칵했다. 몇 마디 욕설로 대신할 수 있는 정도의 분노가 아니었다. 섬찟할 정도의 혐오와 쉽게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모욕감 그리고 이런 폭력이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우울함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서 눈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 분노와 공포, 혐오와 모욕감이 뒤섞인, 실체를 모를 이상한 상태를 가리켜 사회학자들은 복합적 집단트라우마라 부른단다. 어느 소설가는 5·18만 되면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르는 이런 증상에 ‘5·18 최루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나 그 가족의 트라우마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지역사회에서 누적되고 재생산된 사회적 트라우마뿐 아니라 사건 발생 이후 세대가 겪는 역사적 트라우마까지 아우르는 개념이 바로 복합적 집단트라우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이후 다양한 매개를 통해 그 사건을 접한, 이른바 사후노출자(post-exposure person)의 심리적 피해와 고통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피해 상황을 알지 못하다 사후에 그것을 인지한 이들이나 아예 그 사건 이후에 출생하여 뒤늦게 그에 관한 사실을 접하면서 심리적 외상을 입은 이들도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인 셈이다.
4·3은 물론이고 제주 지역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4·3추모식에서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폭력을 정당화하며 피해자들의 상처 위에 또 한 겹의 폭력을 가하는 이들을 보며 힘들어했던 것도 결국 사후노출자로서의 트라우마인 것이며, 그러한 트라우마를 가진 나 또한 4·3의 피해자인 것이다. 그리고 4·3이나 5·18에 대해, 사건이 일어난 그날은 물론이고, 제주나 광주·전남 지역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와 같은 사후노출자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건들에 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해 세력들에 의한 왜곡과 부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에 대한 방증이다.
다만, 이렇게 사후노출자로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사건이 나와 무관한 타인의 사건, 이미 종결된 과거의 것이 아니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며, 더 나아가 내 삶과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고통 받는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된 이상, 아직도 미완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 등을 비롯해 여전히 계속되는 2차 가해의 문제가 이제는 ‘나의 일’이 된 것이며, 그리고 그렇게 된 이상 문제를 대하는 나의 태도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겨나길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 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한강, 『소년이 온다』 中)
작가 한강 또한 사건의 현장에서 직접 5·18을 경험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5·18에 대해 한없는 미안함과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고통으로 오랫동안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 역시 집단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5·18 피해자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용산참사를 보면서도 광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가 쓴 소설 『소년이 온다』 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자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이들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환부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 쓰리고 아프다. 그러나 누군가 그렇게 함으로써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다른 이들도 용기 내어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누군가의 상처는 새로운 피해자를 만들기도 한다. 교과서에 나온 한두 줄로만, 혹은 가짜뉴스가 만들어놓은 왜곡된 시선으로만 5・18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설은 참혹했던 폭력의 현장과 그 폭력으로 인해 생긴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새로운 사후노출자로 만든다. 이 소설을 읽은 이들로 하여금 5·18을 전처럼 쉽게 외면하지 못하도록, 5·18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억을 갖도록 하 는 것이다. 이렇게 불편함과 미안함,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는 집단 트라우마를 앓는 이들이 하나둘씩 많아지다 보면 피해자들의 힘이 점차 커질 것이며, 그렇게 모인 힘은 더 많은 일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5·18과 4·3, 세월호참사가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트라우마를 경험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그 사건을 자신들의 문제로 생각하고 함께 했기 때문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하물며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말해 뭐할까. 그렇다면 백지장을 맞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나의 고통인 것처럼 공감하는 것도 물론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처럼’이라는 조사를 빼는 순간 금방이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기에 느슨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자신이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된다면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가해 세력에 의한 왜곡과 부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인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더 나아가 그로 인해 나의 권리가 침해된다면 누구도 그러한 문제적 상황에 대해 침묵하거나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떠들고, 더 힘든 싸움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더 이상 그 싸움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큰 목소리로 떠들고 싸우는 피해자들이 많아질수록 5·18과 그 피해자들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위축되지 않을까. 적어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망나니짓을 하는 상황이 버젓이 반복되는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이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역설적인 말이지만,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면 좋겠다. 5월이 되면 아프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5·18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도 덤덤하고 무심 하게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몸에 난 상처인 양 아파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많은 피해자들이 조금 더 부지런해졌으면 좋겠다. 평화는 사건이 종결되었을 때 제 발로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다. 폭력은, 특히나 오랜 시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언제든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불의의 세력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경계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과거의 상처를 망각하거나 덮어두지 않고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과 함께 고통을 치유하는 시간을 계속 쌓아가야 한다. 나쁜 놈들은 꽤나 부지런하다. 그러니 그들로부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 모두 피해자가 되어.
김경민 | 국문학과 정치학 중 진로를 고민하다 문학으로는 사회의 모든 이야기를 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국문학을 선택해, 지금까지 한 발은 문 학에 다른 한 발은 문학 바깥의 세상에 두고 있다. 『한국 소설의 인권의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계속 인권과 법, 국가폭력과 시민 등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경상국립대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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