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굴에서 온 편지]
이 밤이 끝나기는 할까?
데이빗 벤바우
여우굴에서 다시 긴 밤을 보낸다. 밤마다 DMZ 철책선 근처 여우굴에 앉아 있노라면 나의 생각은 천릿길을 헤맨다. 깜깜한 데서 아홉 시간을 앉아 누가 나를 죽이러 오지 않는지 살피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 보면 졸리고 때로는 겁이 나고, 늘 긴장이 되고 신경이 곤두선다. 지금은 지루하고 불안하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바쁜 것보다는 지루한 것이 낫다.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물을 한 통만 가지고 왔다. 더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포도 맛 쿨에이드를 물에 탔다. 야전 식량으로 나온 복숭아 캔이 있지만 야식으로 남겨둘 참이다. 주스를 마시고 복숭아 조각을 먹으면서 새로운 날로 달력이 바뀌는 걸 축하해야겠다. 그런데 이곳 모기는 방충약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면 한국 모기는 미국 방충약에 면역이 됐는지도 모르지. 방충약을 따라가면 언제나 인간의 신선한 피를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방금 무슨 소리지? 뭔가 딱 부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또 들린다. 남쪽의 냇가 쪽이다.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철모를 쓰고 있으니까 소리도 잘 안 들리고. 철모를 벗고 손을 동그랗게 말아 귀 뒤에 대고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려본다. 조용해졌던 벌레들과 개구리들이 계속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쪽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냥 사슴이면 좋겠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대학교에 다니던 평범한 미국 청년이 대한민국 DMZ의 여우굴에서 소총을 들고 앉아 긴 밤을 지새우고 있는 처지라니. 여우굴에 혼자 있노라면 시간은 더디 가고 계속 긴장해야 한다. 아직 저녁 10시도 안 됐다. 아침에 트럭이 우리를 데리고 갈 때까지 9시간이나 더 남았다. 벌레들이 조용하다. 오늘 밤은 북쪽보다는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더 신경이 쓰인다. 최소한 북쪽에는 3미터 높이의 철책선 꼭대기에 날카로운 철조망이 둘러 있고 크레모아와 감지기가 달려있다. 오래된 흑백 영화를 보면 카우보이가 이런 말을 하는데 오늘이 꼭 그런 날이다. “뭔가 이상해. 너무 조용해.” 그건 문제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야 오늘만은 피해 가라! 귀에 손을 동그랗게 대면 멀리 있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지만 윙윙대는 모깃소리도 더 크게 들린다. 비상시에는 소총을 재빨리 들 준비가 되어있다. 심장이 더 빨리 뛴다. 심장에 좋지 않다. 아드레날린이 심장으로 펌프질 되지만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굴에 앉아 듣고, 살피는 것뿐이다.
북한의 대형 스피커가 울리고 장송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튜바와 드럼이 포함된 오케스트라와 큰 소리로 노래하는 합창단의 소리는 바람을 타고 들렸다가 사라졌다. 누군가 근처에 있다면 나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있을 거다. 개처럼 헐떡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개구리 하나 벌레 하나 울지 않고 안개는 점점 짙어진다. 새 한 마리가 우니까 다른 새가 대답한다. 밤새가 운다는 것은 북한군이 출몰할 거라는 징조다. 이제 대형 스피커에서는 ‘부커 선장의 연설’이 흘러나온다. 우리를 ‘자본주의의 개’라고 부르는 대목도 어김없이 나온다. 부커 선장과 푸에블로호의 해군 승무원 전원이 북한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참 애석하다. 하루라도 빨리 석방이 되면 좋으련만. 분명 고문을 받고 있을 거다.
어둠이 내린 진흙투성이의 굴에 앉아 있으면 사방에서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저쪽에 보이는 덤불은 내가 5시간 전에 왔을 때부터 있던 건가? 덤불이야 사람이야? 보면 볼수록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 새 휘파람 소리가 내 앞쪽보다 뒤쪽에서 더 많이 들리는 것 같다. 오늘 같은 밤에는 여우굴에 누군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비무장지대는 수렵장 같다. 우리는 모두 사냥꾼인 동시에 먹잇감이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무섭다. 그때마다 시간이 별로 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니까. 차라리 시계를 안 보면 시간이 더 빨리 갈지도 모른다. 몇 시일까? 딱 한 번만 확인해 보자. 겨우 저녁 11시. 오늘 밤은 정말 영원 같다. 날이 밝아지고 언덕 너머로 해가 떠오르면 좋을 텐데.
이런, DMZ 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우리 쪽 크레모아 지뢰가 터진 건지 아니면 북한군 수류탄인지 알 길이 없다. 사람이나 사슴이 지뢰를 밟았는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졸린다. 뺨을 때리면 잠이 달아날까? 아니야 소음을 내면 안 된다. 양 손등을 꼬집어 봤다. 따끔한 느낌에 잠이 조금 깼다. 이제는 100에서부터 1까지 3씩 건너가며 세어 보는 거다. 100, 97, 94, 91, 8…. 머릿속으로 상상의 집을 지어본다. 이제 전투식량을 먹을 차례인가? 어, 벌레 하나가 눈에 들어갔다. 잡았다. 눈이 간지럽네. 팔과 목 언저리도 방금 물린 모기 자국으로 간지럽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싶은데 안전할까? 깔고 앉은 모래주머니는 몇 시간을 앉아 있기에는 너무 딱딱하다. 점점 추워지는 게 방탄조끼를 걸치고 지퍼를 올려야 할 때인가 보다. 그러면 조금 더 따뜻해진다. 이제 벌레와 개구리가 울기 시작하고 새들이 휘파람 소리를 내지 않으니 다행이다.
M-14는 좋은 총이다. 포트 딕스 신병 훈련장에서 작동법을 능숙하게 훈련받은 게 다행이다. 표적이 일어설 때마다 앞의 땅을 맞추었더니 픽픽 쓰러졌다. 신형 M-16 소총은 사용하기 그렇다. 믿을 수 없다. 반면에 M-14는 막히는 일 없이 매번 발사된다. 무겁지만 강력하다. 가까이에 있는 글래디스 전초기지에서 기관총이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감시초소에 유선을 넣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다. 아직 12시도 안 됐다. 오늘 밤은 끝이 안 난다. 힌슨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마지 감시초소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지도 모른다. 모두 자고 있다면 일어나지 않고 뭐 하는지.
토마토소스에 담긴 콩과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전투식량, 눅눅한 크래커, 땅콩버터, 복숭아 통조림, 포도 맛 쿨에이드를 먹어야겠다. 지금처럼 배고플 때는 모든 게 맛있다. 빈 캔들은 오늘 밤 DMZ 근무 나올 때 음식들을 담았던 마분지 상자에 다시 넣어야겠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의무라고 생각해서 군에 입대했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을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밤새도록 여우굴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벌레들과 개구리들이 다시 규칙적으로 지저귀고 개골개골하기 시작했다. 이 소리가 좋다. 어둠 속에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별들 좀 봐. 아름답다. 하늘은 맑고 비가 내리지 않는다. 조금 춥기는 하지. 어, 잠깐, 이게 뭐지? 뭔가 이상해. 뭔가…. 뭐지? 괜히 불안하네. 야생 동물 냄새 같은 게 나. 벌레들하고 개구리는 계속 우는데. 하지만 뭔가 이상해. 이게 뭐야. 커다란 고양이가 여우굴 가장자리에 웅크리고서 나를 노려보고 있잖아. 나도 모르게 “쉬-위-익!” 하는 소리를 내니까 뒤로 돌아 달아나 버린다. 꼬리가 없었다. 내 머리 옆쪽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 모래주머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거다. 휴,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렇게 큰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 가만있어봐. 비무장지대에는 고양이가 살지 않는다. 민가도 없다. 야생 고양이었고 꼬리가 없었다면 스라소니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컸던 거다. 내가 눈치를 못 채게 조용히 다가온 거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은 있었다. 여우굴에 앉아서 별들을 마냥 보고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내 머리를 덮치려고 했던 걸까? 나를 작은 먹잇감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여우굴에 앉아 있는 내 머리만 보였을 테니까. 빈 깡통에서 콩하고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른다. DMZ에 스라소니가 산다는 말은 들었지만 본 것은 처음이다. 지난주에 중위가 엄마 살쾡이하고 장난꾸러기 새끼 스라소니 세 마리가 오솔길로 걸어가는 걸 봤다고 했다. 중위하고 주간 순찰조는 언덕의 수풀에 숨어 침입자가 오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중위는 정찰조가 자랑스러웠다는군. 쥐 죽은 듯이 있었기 때문에 스라소니들은 그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중위는 그게 바로 ‘규율 있는 정찰조’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스라소니가 자기 머리 옆 30센티미터 가까이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면, 스라소니와 눈을 마주쳤다면 그 정찰조도 ‘규율’을 분명 잃고 말았을 거다. 정말 으스스한 순간이었다. 내 머리를 덮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작은 사슴 아니면 꿩 같은 새들을 잡아먹겠지. 분명 돼지도 죽일 수 있을 거다. 이곳은 거친 곳이다.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여기를 살아서 나가고 나중에 아이들이 생긴다면 잠자리에서 해 줄만한 이야기가 될 거다.
다음엔 어떤 일이 생길까? 빨리 중위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지난주에 중위가 봤던 그 스라소니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여기서 겪었던 일들은 집에 있는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을 거다. 군대에서 겪는 진짜 일은 소설보다 더 상상 이상일 때가 많다. 지금 몇 시지? 2시 50분밖에 안 됐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잠이라도 자면 좋겠다. 아 졸린다. 4시간 반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 밤이 끝나기는 할까?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노인이 되었다. 오래전에 나는 DMZ의 밤들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나 자신의 일부분이 한국의 비무장지대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데이빗 벤바우 | 1968년부터 16개월 동안 한반도 DMZ에서 미군 보병으로 복무한 미국인.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곱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의 추억과 아픔이 담긴 DMZ에서의 기억을 한국의 시민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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