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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4_5 박종호_세 번째 코리밀라 방문, 사과나무 두 그루

by 어린이어깨동무 2023. 5. 18.

[한반도 평화교육] 

세 번째 코리밀라 방문, 사과나무 두 그루

박종호

 

언덕 위에 오밀조밀하게 지은 집들이 모여 있고, 텃밭에는 직접 기르고 가꾼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토끼와 닭, 소도 어슬렁거리면서 집 주위를 돌아다닌다. 저 언덕 아래는 파란 바닷물이 흐르고 있고, 저 건너 멀리 보이는 곳은 스코틀랜드인가, 먼 옛날에는 수영을 해서 건너다녔다고 한다. 코리밀라 공동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달려야 하는 밸리캐슬에 있다. 이 공동체에 2017년 겨울, 2019년 겨울에 어깨동무 평화교육 연수로 방문하고 2022년 이번에는 여름에 다시 찾았다. 당신은 도대체 왜 그리 먼 곳까지 가는가? 질문을 바꾸어 묻자. 나는 코리밀라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세 번씩이나 가서 얻고 싶은 걸 얻었는가?

 


희망 가꾸기 여름학교(‘Nurturing Hope’ Summer School, 2022.7.15.~8.22)에 초대를 받고 코리밀라(Corrymeela) 공동체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 점심시간을 막 지난 오후였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가 학교에서 ‘출장’ 허락을 받아 외국에 나가는 일은 드문 일이고, 서른다섯 해 학교에 근무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 데릭 윌슨 박사님이 꼼꼼하게 보내주신 초대장에는 서울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여름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한국의 학교에서도 학생들을 위해 필요한 행사이니 꼭 보내주시면 좋겠다는 부탁이 담겨 있었고,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이성숙 팀장이 여름학교 행사 일정에 맞게 더블린까지 가는 비행기 편을 마련해 주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었다.

이미 금요일에 행사를 시작한 뒤라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대한민국, 미국, 인도, 뉴질랜드, 콜롬비아, 리투아니아, 영국에서 온 평화교육을 공부하는 연구자, 학생, 현장에서 실천하는 활동가들이 모인 넓은 방은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데릭 윌슨 박사님은 심은보 선생님과 나를 방 가운데로 불러내서 다른 참석자들에게 서울에서 온 사람이라고 이름, 좋아하는 영화로 소개를 하라고 했다. 음, 나는 ‘벨파스트’ 영화를 보고 난 뒤라 ‘벨파스트’라고 말했는데, 눈치를 보니 본 사람들이 많지 않은 듯, 반응이 별로다.^^ 

‘희망 가꾸기’, 빼곡하게 공부하는 시간이 이어지는데 재미있는 걸 보았다. 사례를 발표하고, 모둠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모두 같은 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례 발표를 하고 이어서 모둠 토론을 할 때 주로 질문을 많이 한다. 그 질문은 발표자에게 궁금한 것, 조금 다른 의견이나 평가 제안을 담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모둠 대화(!)나 전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내 질문을 하는 것인데, 앞 사람이 질문하는 순간, 오지랖 넓은 이가 꼭 있어서 아, 그것은 이렇고 그렇지요? 하는 낯익은 장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 한 사람이 앞 사람 질문에 대해 코멘트를 해도 되냐고 하자, 사회자가 단호하게 아니, 당신 질문을 하세요. 라고 이어간다. 우리나라 학교, 어른들 모임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장면이고, 돌아와서 이 경험을 나누었을 때,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놀라던 동료들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갈등이 일어나고 그 갈등의 현장에서 겪은 사례를 발표했는데, 아, 그건 이렇고 저런 과정으로 이런저런 방법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고 막 친절하게 도움말을 드리고 싶은데, 당신은 당신 생각을 말하고, 당신 질문을 하라니…. 이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알았다. 상대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 대화는 내가 내 이야기를 할 틈을 찾는 게임이 아니고, 상대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듣고, 경청하고,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게 대화이고 사람과 관계도 이런 경청하는 대화에서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또 대화의 기술이나 기법이라고 하겠지. 그렇지만 기술이나 기법 이전에 사람에 대한 존중, 경청하는 자세가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한다. 

 


7월 18일(월) 북아일랜드, 7월 19일(화) 남한과 북한, 7월 20일(수) 콜롬비아 사례를 중심으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발표와 대화는 ‘긍정하고 풍요롭게 하는 관계와 사회를 촉진하는 역학 관계(Dynamics), 어떻게 정체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갈등의 목소리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다루었다.

나는 7월 19일(화) 한반도 갈등의 사례를 공유하는 순서에 참여하여 김동진, 권동혁, 심은보 선생님과 함께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트리니티 대학에 몸담고 계신 김동진 박사는 한반도 대립과 갈등의 역사(과거와 현재),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시민단체의 역할(어린이어깨동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사례를 잘 마련해 온 영상 자료와 함께 유창하고 유머를 담은 영어로 발표하였다. 뒤를 이어 권동혁 과장이 통일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 긴장 완화, 평화 프로세스 경과와 앞으로 과제, DMZ 평화예술행사 실천 사례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나는 어린이어깨동무와 만남, 어린이어깨동무가 남과 북의 어린이 청소년을 중심에 두고 해 온 사업들, 2005년 평양 방문(어린이 콩우유 공장과 학용품 공장 참관),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2016) 설립과 평화교육 연구 실천, 평화교육 교사모임 시작, 코리밀라와 교류(2017, 2019, 2022)에서 배운 것을 발표했다. 준비는 많이 했지만, 두서없이 이어가는 내 말보다 이를 잘 정리해서 통역해 주신 김동진 박사님 덕분에 잘 마쳤다. 이어서 심은보 선생님이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과 관계 맺기와 갈등 해결하기, 같은 학년, 학교 선생님들과 협력하여 문제 해결하기 발표가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어진 모둠 대화에서 나눈 질문은 이랬다. 우리는 한국 이야기에서 무엇을 알게 되었나? 한국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나? 아니면 반영될 수 없나? 한국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우리는 관계, 갈등에 영향을 받는 사회, 그리고, 또는 희망의 역동 관계에 대해 어떤 질문을 품게 되었는가? 영어로 주고받는 대화를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우리 한반도의 특수한 사례지만, 같은 고민을 해 온 분들이 주는 격려와 따뜻한 질문은 큰 힘을 주었다. 이것은 북아일랜드 성금요일 평화협정 사례, 콜롬비아에서의 평화 프로세스 추진과 실패의 사례 등을 듣고 내가 한 질문도 비슷했다. 질문을 들으면서 시간과 공간이 달라도 갈등의 현장에서 그 갈등을 풀기 위해 대화하고, 희망을 가꾸어 가는 일은 ‘같은 무게로’ 진행된다는 점을 배웠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도 배웠다. 그들은 기쁘게 일하고, 지치지 않으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코리밀라 공동체에서 내가 머문 숙소 앞에는 사과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공동체 곳곳에 사과나무가 있고, 그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는 공동체 식당에서 아침, 저녁, 간식으로 늘 먹을 수 있다. 이른 새벽 눈이 떠져서 창문을 여는데 그 사과나무 두 그루가 내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한참을 사과나무와 마주 보면서 앉아 있었다. 와, 뭐라 다 글로 옮길 수 없지만. 

 


금요일 오후 데릭 윌슨 박사님 초대를 받아서 박사님 댁에 가서 공동체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랬다. “여기에 온 은보, 종호가 내년에도 선생님들과 코리밀라에 오고, 서울에 코리밀라를 만들어가는 꿈을 갖 고 있다.”고 데릭 윌슨 박사님은 웃으면서 무심하게 툭 건넸다. 

“남과 북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안녕, 친구야’ 인사하며 서로 이해하고 환대하는 모습을 미리 연습하고, 미래 어느 날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을 가꾸기 위해 이 자리에 왔고, 데릭 박사님을 비롯하여 북아일랜드와 코리밀라에서 받은 환대와 교류에서 받은 영감과 상상력을 안고 돌아가서 더 부지런히 노력하겠다.” 

내가 한반도 사례 발표 때, 이렇게 마무리하려고 영어로 미리 적어서 외웠으나,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말이다. 여기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적는다. 나는 북아일랜드와 코리밀라에서 한반도 평화교육의 희망, 그 씨앗을 싹 틔우는 법을 배웠고, 배운 대로 연결하여 실천하고자 애쓰고자 한다. 길은 가는 사람이 있어야 만들어지고, 그 길은 이어지게 마련이다. 어쩌다 내가 그 길에 서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박종호|십여 년 전 후원회원으로 어린이어깨동무와 인연을 맺었으며, 현재는 평화교육 교사모임 회원이자, 어린이어깨동무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른다섯 해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과 지냈고, 남북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만나 서로 환대하고 인사하는 날을 꿈꾸고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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