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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35_5 심은보・최관의_서이초 박선생님을 추모하며

by 어린이어깨동무 2023. 8. 17.

[한반도 평화교육 1] 

서이초 박선생님을 추모하며

 

심은보(자란초등학교 교사)

 

서이초 한 교사가 학교에서 죽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우리는 그녀가 죽은 까닭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녀가 교사라는 사실을 알 뿐이다. 우리는 그녀가 학교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죽어 버린, 이름 모를 그녀는 어쩌면 ‘나’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까닭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죽어간 이름 모를 그녀는 어쩌면 ‘우리’인지 모른다.

돌아보니 ‘그녀’는 ‘나’였고, ‘그녀’는 ‘우리’였다. ‘나’였을지 모를 그녀의 이름 없는 죽음 앞에 안타깝고 안타까워 우울과 슬픔의 빛깔로 2023년 나는 여름 대부분을 채워 나가고 있다. ‘우리’였을지 모르는 그녀의 맥없는 죽음 앞에 분노스럽고 분노스러워 검고 검은 빛깔 옷을 입고 2023년 여름 우리는 주말이면 길거리에 모여들고 있다.

학교가 본디 죽음의 공간으로 만들어 진 것은 아닐텐데 어쩌다 학교가 이렇게 이름 없이 맥없이 스러져 버리고 마는 죽음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고 눌러본다. 풀리지 않은 답답함과 엉뚱하게 여론을 부추기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함께 솟아 올라온다. 이런 나의 마음을 가다듬고 찬찬히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사건이 발생하고 3주가 넘게 흘렀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교육당국은 진상 규명 노력조차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리는 듯하다. 이에 온 나라의 교사들은 주말마다 서울에 모여들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교사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안전한 교육환경을 조성하라는 요구들을 해 나가고 있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교육부를 시작으로 일부 집단은 일사분란하게 ‘학생 인권 조례’가 문제라며 ‘학생 인권’을 공격하고 있다. 또, 또 다른 사안이 터져 나오며 ‘장애 학생’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 와중에 특정 단체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 역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참으로 나쁜 사람들이다. 학생인권을 제한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특정 집단에 대한 손가락질과 혐오, 그리고 공격으로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교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은 ‘수요자 중심’ 교육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부터 아니었던가 싶다. 경제 논리에 따라 교육은 ‘서비스’인 것이고, 수요자의 마음에 차지 않은 서비스에는 자연스레 ‘민원’이 따라오곤 했다. 뒤이어 같은 결을 가진 정책과 법률들이 학교 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학교폭력법이 학교를 먼저 뒤흔들었고, 이어 나온 아동학대법이 학교를 본격적으로 뒤흔들기 시작했다. 학교 안에 살아가고 있는 교사들과 아이들의 삶 역시 브레이크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네 학교를 포위해 버린 자본의 논리들이 문제인 것 아닌가.

사실 우리는 안다. 이번 서이초 사건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수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만, 우리는 외면하고 쉬쉬해왔을 뿐이다. 오늘도 나는 무사하길 기도하며 각자도생 해왔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통해 그녀가 나였으며, 우리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서로가 서로의 연결을 느끼고 확인하며 손 맞잡고 지혜를 모아나가면 좋겠다. 안타까운 서이초 교사의 희생이 좀 더 안전한 상황에서 우리가 교육을 펼쳐질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병들어 버린 우리 사회를 한 번에 바꿔버릴 순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금 찬찬히 ‘학교란 무엇이어야 하는가?’하고 묻게 된다. 어떤 것들이 스며있어야 학교라고 할 수 있을까.

학교는 누구라도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며 공부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또 아이들이 마음 놓고 시도하고 도전하며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마음 놓고 갈등도 겪어 보고, 그를 통해 성장해 나가야 하는 곳이어야 하기도 하다. 그런데 성숙하지 못해 불안감 많은 어른들의 자의적인 개입이 너무 빈번하여 학교를 뒤흔들곤 하는 것이 현재 학교의 상황이다. 잘 따져 생각해 보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교사들 역시 마음 놓고 교육 활동을 펼쳐갈 수 있는 곳이 학교여야 하는 것이다. 불안한 교사들 앞에 아이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일이다. 불안감이 가득한 학교에 학부모들 역시 마음 놓고 아이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

교사들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지나가서는 안된다. 학부모를 불신하고 공격해서는 안된다.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사이에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모두가 안전한 학교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내 아이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우리 서로가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곳 역시 학교여야 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학교의 안전을 뒤흔드는 것들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장치의 보완일 것이다. 현재 다양한 단체들이 현장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교육당국이 여전히 학생인권 법안 이야기를 소리 높여 외치며 현장 교사들의 목소리들을 제대로 안 듣고 있다는 데 있다.

서이초 사건 이후에도 내 둘레에 몇몇 선생님들이 아동학대법으로 신고를 당하는 일들이 발생해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다. 무자비하게 교사들을 직위해제하고 있는 ‘아동학대법’의 개정은 특히 서둘러야 할 듯하다. 아울러, 민원 처리에 대한 절차와 방법, 내용 등에 대해서도 세밀하고 정교하게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외에 여러 사람들이 꺼내놓는 지혜가 모인다면 지금보다 훨씬 안전한 교실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법과 제도, 시스템이 마련된다고 해도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자칫 만들어진 법들이 또 니 일 네 일로 옮겨가서 가장 약한 고리의 사람들에게 전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교사들끼리도 교실을 넘어서서 동료 교사들과 협력하며 함께 성장해 가는 문화들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또 만들어 놓은 시스템들이 교사와 학부모 소통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상처가 크기에 마음을 열어 다가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우려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신뢰와 협력 없이 교육은 불가능하다. 신뢰와 협력은 열린 소통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학교 마다 상황에 맞는 소통의 시스템과 문화들을 차근차근 만들어 간다면 좋겠다. 그것들이 학교가 신뢰를 얻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교사들에게 힘을 내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상품이나 서비스 품목이 아니다. 이에 동의한다면 한 사람의 삶과 성장 이야기를 함께 하는 ‘교육’에 ‘민원’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 나누며 살아가는 동지일 순 없는 것일까.

모쪼록 이번 일이 우리에겐 지혜롭게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나 역시 ‘나는 서이초 그녀다’라는 마음으로 이번 일이 이어가는 이야기에 함께 할 생각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언젠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책에 적어 놓은 나의 이야기를 나누며 마무리할까 한다.

함께 한다는 것은 나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너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됨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여유롭게 채워 주는 일, 하여 서로가 서로를 주체로 세워 주는 일, 그것이 바로 또한 함께 사는 일 아닐까 싶다. 교사도, 학부모도, 아이들도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채워 주며 함께 살아가고, 그 가운데 성장해 갈 수 있는 곳이 학교라면 참 좋겠다.
(심은보・여희영, 『오늘도 학교에 갑니다』 71쪽)

 

 

최관의(이수초등학교 교사)

 

서이초 박선생님! 끊어진 길 위에 서서 그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 무서움을 홀로 견디어내느라 힘드셨지요?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요. 아픈 선생님 손을 잡아주지 못했네요. 서이초 박선생님 부모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그 마음을 어찌 미루어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그저 곁에 머물며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멀리서나마 부모님의 손을 잡아드리며 따님의 아픔과 못 다한 교사의 꿈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동료교사로서, 선배교사로서 교육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에 책임을 느끼며 이 고통스런 상황을 풀어가고자 갖고 있는 생각을 밝힙니다.

학부모와 우리 사회 구성원에게 말합니다

교사의 자율성, 교사의 교육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교사의 힘은 얇은 유리잔과 같습니다. 그것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만 쓸 수 있는 약한 힘입니다. 하지만 학부모와 사회가 존중하고 지켜주려 노력할 때 그 힘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심리적으로 고통스럽게 지내던 아이가 교사와 학부모가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며 노력하면서 행복하고 자기답게 성장하는 기적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다만 교사의 자율성이 살아 움직일 때, 학부모를 비롯해 학교를 둘러싼 사회가 이 자율성을 지켜주려 노력할 때, 교사를 믿고 기다릴 때 가능한 기적이라는 겁니다.

교사가 갖고 있는 힘이 산산 조각이 날 때 교사도 아프고 아이들도 아프고 사회도 아픕니다. 그 힘이 부서진 지금 교사는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면서도 아이 몸에 상처가 나면 아동학대로 몰릴까봐, 친구에게 상처 주는 말하는 아이를 야단치면서도 정서학대가 되지 않을까 움츠러들게 됩니다. 모둠학습을 위해 모둠을 나눈 날 밤 잠자다 문득 떠오릅니다. ‘아이가 원하는 모둠에 보내주지 않았다고 민원전화 오는 거 아냐?’하는 생각이. 이럴 때 교사가 갖고 있는 교수법, 생활교육방법, 대화법 등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약해진 교사의 마음을 읽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교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뒤흔들고 거친 행동을 합니다. 거기에 비례해 학부모의 거친 민원도 늘어갑니다. 교사는 아이들과 눈 맞추며 가르치고 배우는 짜릿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연구하고 수업하는 데 가야할 마음을 쓸 데 없는 곳에 쓰고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오늘도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에게 말합니다

손을 잡아야 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학부모와 손을 잡고 옆 교실 동료 교사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일부 학부모가 교사의 교육권을 침해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깊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회병리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사회는 불안이 매우 높은 거친 사회입니다. 사회가 병드니 아이들이 아픕니다. 자식 키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학부모와 손잡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더 행복한 교육,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을 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댈 때 불안으로 학교를 공격하는 데 쓰이는 학부모의 마음을 아이들 교육으로 돌릴 수 있다고 봅니다.

옆 반 교사, 더 나아가 모든 교사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지금의 교실 붕괴현상은 몇 학부모나 교사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깊은 병과 관련이 있습니다. 목숨을,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는, 학교와 교실을 거쳐 가는 정거장 정도로 여기는 병이 너무 깊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 교사들도 그 병에서 자유롭지 못 합니다.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닫힌 교실 문을 열고 옆 반 동료 교사와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대며 더 나은 교육을 위해 힘쓸 때 이 고통스런 상황을 버티어내면서 희망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연대한 힘으로 정부, 정치권, 교육행정기관이 법과 제도를 바꾸도록 만듭시다. 박선생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사를 사지로 내몬 법을 개정하고 교사의 교육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교사가 온갖 학부모 민원에 그대로 노출되어 교육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금의 학교체제도 학교 구성원의 힘으로 바꿉시다.

새벽 녘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벌떡 일어나 씁니다. 장마로 구름 낀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옵니다. 희망이란 낱말을 떠올리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제 아이들 보러 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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