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이슈]
22대 총선과 한반도 평화
김성경 (어린이어깨동무 이사)
솔직히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는 정치인을 믿지 않는다. 사적 욕망이 아닌 공적 가치에 투신하는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모두들 국민을 위해 정치에 나섰다고 외치지만 ‘의원’이 되는 순간 대부분은 비대해진 자의식의 노예가 되곤 했다. 공익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당 내 수많은 이해관계가 뒤엉켜 정치가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오죽하면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치인과 정당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농담으로 여기는 유권자가 많아졌을까.
그럼에도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정당과 정치인의 역량에 따라 모두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싸움만 일삼는 정치로 인해 일상은 갈등과 분열로 가득 찼고, 공동체와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정치인들의 부추김에 시민들도 덩달아 편을 갈라 싸우고 이유도 잊은 채 상대방을 절멸하겠다는 적대감이 깊어만 갔다. 기술 발전은 상당수에게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만들어주었지만 반대급부로 혐오와 적대를 무차별적으로 확산시켰다. 최근 언론 기사와 소셜미디어의 데이터를 추출하여 조사한 ‘뉴스1’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8년과 비교했을 때, 2022년의 한국 사회 갈등 정도는 무려 2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갈등 공화국, 정치가 실종된 지난 몇 년간 한국사회가 걸어온 길이다.
종북 패러다임 종언의 두 얼굴
이번 총선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상대방을 향한 ‘심판론’이 모든 이슈를 뒷전으로 물러 세운 ‘기이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야당의 ‘윤석열정권 심판론’과 야당 지도부의 사법리스크를 강조한 여당의 ‘범죄자 심판론’이 총선에서 맞부딪혔다. 유권자에게 정책과 비전으로 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를 일러바치는 기괴한 선거가 이번 총선이었다. 유권자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차악에 표를 줬고, 결국 야당이 과반을 훌쩍 넘는 의석을 얻어 냈다. 민심은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면서 집권한 윤석열정부가 정의롭지 않게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판단했고, 현정부가 경제, 언론, 외교국방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윤석열정부와 여당이 표를 얻기 위해서 ‘종북’과 ‘운동권’ 청산이라는 프레임을 활용하고자 했지만 그것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번 총선은 탈냉전 이후 한국 정치 지형의 주요 기준이었던 ‘북한’과 ‘종북’ 패러다임의 종언을 증언한다. 아마도 윤석열정부와 여당은 이번에도 ‘북한’을 활용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안보 불안을 체감한 중도층 중 상당수의 표심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총선을 앞두고 국정원과 통일부가 나서 북한이 군사도발 및 사이버 공격을 통해 총선에 개입하려 한다는 발표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윤석열대통령이 직접 북한의 총선 개입 가능성을 경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북한’의 위협과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 세력이라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대다수의 유권자에게 소구력이 없었고 오히려 그러한 프레임을 제시한 정부와 여당이 구태 정치 세력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지난 대선에서도 확인되었던 것인데 분단국에서 오랫동안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 지형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해 온 ‘북한’이 아닌 젠더, 세대, 계층 등을 둘러싼 공정과 정의가 표심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주요 의제도, 상대방을 낙인찍는 기제로도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지긋지긋한 ‘종북’ 프레임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종북’ 프레임이 정치적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하다는 민주적 합의가 도출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만성화된 분단체제에서 한국 사회가 북한을 먼 타자로 인식하게 되면서 북한이라는 이슈와 ‘종북’이라는 낙인이 동시에 정치적 힘을 잃어버렸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만큼 분단극복이나 한반도 평화라는 과제가 현실 정치의 주요 아젠다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뜻하며, 더 나아가 통일이라는 지향도 비현실적으로 감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반도 평화에 무관심한 현실 정치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무관심은 정당의 공약에서도 일정 부분 확인된다. 총선을 즈음하여 남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그리고 시민평화포럼이 공동으로 22대 총선에 참가한 주요 정당의 남북관계 및 외교정책 공약 평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시민사회와 전문가들이 모여 각 정당의 정책을 비교하고,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민사회의 제안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주요 6개 정당의 남북관계 및 외교정책 공약을 1)우발충돌 방지 방안 및 한반도 위기관리 2)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 정착 방안 3)남북관계 발전 방안 4)인도·교류협력 및 인권증진 방안으로 구분하여 분석하였으며, 각 분야별로 포괄성과 구체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했다.
전반적으로 국민의힘은 한반도의 군사적 충돌을 관리하기 위해서 대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원칙을 제시하면서도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 협력을 통한 강력한 대북 억지력으로 상황을 관리할 것을 천명했다. 지난 정부의 대북정책이 유화적이었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원칙과 일관성’있는 대북정책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 준비와 북한 인권 개선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면에 더불어민주당은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9.19 군사합의 이행 및 남북대화 채널 복구를 강조하였으며, 한미동맹을 포괄적 동맹으로 발전시키면서도 한반도 주변 주요 4개국과의 외교를 강화하는데 주력할 것임을 밝혔다.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초당적 대북정책과 사회적 대화 등을 통해 통일관련 국민공감대 형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남북교류협력재개 및 인도주의적 협력의 복원과 북한과의 다양한 교류협력 사업도 공약으로 제시했다.
여야의 공약은 강력한 한미동맹과 남북 사이의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라는 원칙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유사점이 존재한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양당의 정책이 기존의 논의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최악을 치닫는 한반도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다양한 공약이 부재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야의 공약에 차이도 존재한다. 예컨대 남북관계 및 세계정세가 급변하는 현 상황에서 여당의 정책은 평화적 해법보다 군사적 대결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측면에서 반평화적이며,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은 하노이노딜로 재평가가 요구되는 문재인정부의 접근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실망스럽다. 사실 양 당의 이러한 입장은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것인데 유권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은 남북관계 분야에 양 당 모두 정책적 역량을 투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나마 녹색정의당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면서도 녹색평화 패러다임에 기반을 둔 공약으로 평가 가능하다. 정당 중에서는 유일하게 상호군축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하였으며, 녹색 평화 6자회담 추진, 평화-공생 원칙의 균형외교, 핵동결-제재완화를 통한 비핵화 추진, 제재완화-경협 재개 등을 통해 남북관계의 질적 개선을 제안하였다. 이번 총선에서 깜짝 돌풍을 일으켰던 조국혁신당은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반환 공론화와 남북간 외교관계 수립을 내세운 것이 주목할 만하지만 공약의 내용이 세심하게 짜여있지 않았다. 한편 새로운미래와 개혁신당은 한반도 비핵화 부분에서만 소략된 공약을 제시하였고 한반도 위기 관리, 남북관계 발전, 그리고 인도·교류협력 등의 분야에서는 아예 공약이나 정책이 부재했다.
이렇듯 주요 정당의 남북관계 관련 공약은 여러모로 부족하다. 아무리 표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분야의 부실한 공약은 한국 사회의 근원적 문제를 정치권이 외면한 것에 진배없다. 날로 격화되고 있는 한반도 군사적 충돌 위험에 대해서 정치권이 심도 있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우려스러운 일이다. 정치권 스스로 남북관계 개선을 국회의 의무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더욱 공고해지는 경향도 포착된다. 거기에 지금까지 국회의 역량을 봤을 때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라는 고차방정식을 실행할 역량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역할
안타깝게도 이번 국회는 지난번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란 쉽지 않다. 선거 때마다 유권자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정치권에 투영했지만 그때마다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지난 2년여 동안 멈춰버린 ‘정치’가 이번 국회에서 복원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미리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나서 바꿔낼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결국 더 나은 정치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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