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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레터(글)

피스레터 No42_1 김성경_계엄과 내란 이후

by 어린이어깨동무 2025. 5. 17.

[한반도 이슈] 

계엄과 내란 이후

김성경(어린이어깨동무 이사)

 

계엄과 내란은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진작부터 전조는 차고도 넘쳤다. 비단 이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미 야당과 여당 사이의 타협이나 협력이 사라진지 오래고, 대통령이라는 절대적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 세력 간의 암투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결합되어 극악해질대로 극악해졌다. 그나마 이전의 대통령들은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평생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켜온 검사 출신 대통령에게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절대 권력에 취한 윤석열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입법부를 비롯한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을 제압하는데 열중했다.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언론, 연구자, 지식인, 예술인, 하물며 의사까지 가리지 않고 ‘반국가세력’이라고 몰아세웠다. 결국 대통령의 칼춤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낀 유권자들은 지난 총선에서 야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선택했지만, 대통령은 급기야 선거 결과 자체를 믿지 않았다. 자기 확신‘만’ 가득했던 대통령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성찰하기 보다는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12월 3일, 지금이야 말로 ‘국가비상사태’라고 외치며 느닷없이 계엄령을 발포하고야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계엄과 내란이라는 현 상황이 ‘개념 없는’ 지도자 개인에 의한 이례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일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을 단죄하고 내란에 가담한 동조자들을 처벌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진보적 지식인들의 주장처럼 한국 사회의 오래된 엘리트 집단을 개혁하면 다시금 민주주의는 굳건해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제는 우리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인정할 때이다. 한국 사회는 계엄과 내란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진실을 말이다. 이 국면이 지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한다고 해도 우리의 미래가 갑작스레 나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계엄과 내란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결과이자 증상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든 계엄과 내란과 같은 정치적 상황이 반복될 수 있음을 뜻하고, 더 나아가 그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인해 더 큰 위기에 빠지는 것을 막아냈지만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지 못하면 비슷한 위기는 더욱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것의 강도 또한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3월 15일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15차 범시민대행진’ (사진 : 임재근)

 

정치적 위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사회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완전히 쪼개져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를 둘러싼 갈등과 경쟁은 민주주의에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는 경쟁과 타협은커녕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대방을 혐오한다는데 있다.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소환하며 대놓고 혐오의 정동을 확산하기도 하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근히 다른 입장을 내세우는 이들을 ‘척결’과 ‘절멸’의 대상으로 감각하기도 한다. 서부지법의 폭력사태, 건국대 앞 양꼬치 거리의 혐중 시위 등은 이미 임계치를 넘어선 혐오 행위지만, 계엄에 맞선 ‘현명하고 선한’ 시민들 마음 깊은 곳에서도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 정서가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다.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람’이 아닌 열등하고 야만적인 동물성으로 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혐오가 위험한 것은 그것의 대상을 퇴출함으로써 사회의 정상적 상태 혹은 인간의 규범이 지켜진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즉, 사회와 인간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것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잠시 불안을 잠재우려는 시도가 바로 혐오의 본질이다. 역사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집단과 존재들을 향한 혐오가 확산되어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 ‘북한’·‘중국’과 연계된 세력만을 척결하면 혹은 ‘내란 세력’만 단죄하면 마치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낸 부유하면서도 민주적인 한국 사회가 복원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가장 뻔한 거짓말이라는 말이다.

정치적 양극화를 넘어서 혐오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된 배경과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 기원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서 찾는 이들도 많다. 갑작스런 대통령의 탄핵과 이후 권력을 잡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라는 프레임이 보수 정치 세력에게 존재론적 위협으로 감각되었다는 진단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일견 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로는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97년 금융 위기 이후에 한국 사회의 새로운 윤리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정치적 증상으로 현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가 경험하고 있는 극우화와 타자를 향한 혐오 확산을 고려하면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은 글로벌한 현상의 로컬화 사례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체계를 안착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비슷한 형태의 위기가 발생한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의미다. 즉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 아래 경제적 자원이 특수한 계층에 집중되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각자도생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이들의 증폭된 생존의 불안감을 활용하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가시화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각 국가의 오래된 갈등 구조가 정치적 위기가 발현되는 방식과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에는 인종과 이민 문제를 고리로 트럼프 대통령이 권력을 잡았고, 유럽 국가 대부분에서는 난민과 이민에 대한 반대 정서를 활용한 극우 정당이 약진했다.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이주자와 난민이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사회적 자본을 소진한다는 주장을 정치 캠페인으로 활용했다.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전광훈 목사를 대표로 하는 세력들이 중국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고, 종북 세력의 위협을 운운하며 분단 사회의 뿌리 깊은 불안감을 자극한 것도 이와 비슷한 궤를 한다. 급격한 변화에 소외된 노년층이나 경제적 양극화로 삶의 질이 하락한 평범한 시민들, 거기에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청년들의 좌절감과 분노의 화살을 ‘종북 좌파’와 ‘중국인’을 과녁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상당수 시민들의 극우화 이면에는 경제사회적 소외와 배제가 깊게 배태되어 있음을 뜻하고 사회경제적 개혁 없이는 불안한 정치적 상황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편, 계엄을 온 몸으로 막아낸 시민들의 마음도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검찰 권력의 부당함이나 계엄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당인 민주당의 모든 정책이나 노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적극적 정치 관여층에 의해 침탈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정치인 팬덤이 확산되면서 이들의 정치적 행위가 또 다른 혐오를 조장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는 평범한 시민들을 존중하기 보다는 이들을 향한 반복적인 조롱과 희화화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혐오가 또 다른 혐오를 불러일으킨다는 자명한 사실이 계엄과 내란 세력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망각되고 있는 것이다. 목소리가 큰 적극적 정치 관여층은 마치 대통령만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장담하지만 이들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자의 정책에서 한국사회가 당면한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번 대선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후보들에게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 즉 경제적 양극화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공약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사실상 유력한 차기 대통령인 이재명 후보는 민주당을 중도우파 정당으로 정의하면서 성장을 강조하는 정책을 내세우기까지 한다. 중도층 표심을 얻겠다는 명분 아래 재벌 기업 총수들과 함께 있는 장면도 여러 차례 연출하고, 부동산과 자산 격차에 대해서도 시장의 조율 기능을 강조한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개선하기 위해 소수에게 집중된 부를 재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적극적 조세 정책 없이 이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만약 누군가 이재명 후보나 민주당의 사회경제 개혁에 대한 미온적 태도에 대해서 비판이라도 하려 하면 지금은 계엄과 내란세력 척결이 먼저라는 익숙한 변명만이 되돌아온다. 환부는 점점 더 곪아 가는데, 겉의 피고름만 닦아내면 될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가 마주한 위기는 셀 수 없이 많다. 게다가 모든 위기는 복합적이며 서로 연관되어 있다. 정치경제적 양극화, 국제 통상 환경 변화, 지역 소멸, 인구 감소, 기술 격차, 생태 환경 위기, 젠더, 세대, 지역 갈등, 한반도 전쟁 위기, 동아시아 군사 위협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없다. 그럼에도 사회적 역량이 유지되고 갈등 조정 및 사회통합 기반이 굳건하다면 분명 해결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을 향한 혐오를 멈추고, 서로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대화의 상대로 초대해야만 한다. 이는 윤리적이며 도덕적 언설만이 아닌, 혐오의 감정 심연에서 작동하고 있는 경제적 불안 상태와 실존적 위기 상황을 개선할 때 가능하다. 즉, 상당수 시민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근원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사회 통합도 가능하며 이를 기반으로 복합 위기에 대해 적절한 대응도 구체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계엄과 내란은 그것을 일으킨 ‘사람’에 대한 처벌만으로는 완전히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했던 근본적 원인을 해부하여 도려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부의 편중이고, 정의와 공정을 내세운 극한의 경쟁주의와 물질적 풍요만을 쫓는 성장주의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이러한 구조의 전면적 개혁만이 향후 언제든 도래할 수 있는 ‘위기’를 근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만큼 엄청난 과업이며,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계엄과 내란 이후라는 시대적 요구와 역대 찾아보기 어려운 권력이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집중될 것이라는 사실은 사회 개혁을 위한 충분한 토대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으로 당선될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의지에 따라 한국 사회는 개혁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갖추게 된 셈이다. 그만큼 다음 정부는 사회 변혁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권력의 집중화로 인한 폐해로 귀결될 위험성도 동시에 안고 있다. 권력이라는 양날의 칼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따라 한국 사회의 질적 변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권력자들은 당선이 되는 순간 ‘선하고 옳은’ 의지를 내팽개치고 이익을 쫓아 왔지만, 부디 다음 정부만은 ‘예외’이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무엇보다 다음 정부는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런 시민들을 다시금 광장으로 내몰지 않기를 바란다. 박찬욱 감독이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제는 진짜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아는 현명한 이가 지도자가 되었으면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 국가의 오래된 갈등 구조가 
정치적 위기가 발현되는 방식과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중국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고, 
종북 세력의 위협을 운운하며 분단 사회의 뿌리 깊은 불안감을 자극한 것도 
이와 비슷한 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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