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평화를 만든다]
바람을 닮은 어린이들과 함께 뛰노는 봄
임수연
1998년 4월 어느 날,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방바닥에 널린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새날을 여는 아이들의 한마당’에서 남녘 어린이들이 북녘 어린이들에게 건네는 그림을 전시하고, 새로운 그림 편지를 받을 채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자원활동가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도화지가 들어가는 비닐 파일에 그림을 넣고 비가 와도 안전하도록 유리 테이프로 손코팅을 하는 일이었다. 다음 주 어린이날 이른 아침 행사장에서 다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긴 줄에 그림들을 주렁주렁 매달며 어린이들을 기다렸다. 1997년과 1998년 두 해에 걸쳐 모은 남녘 어린이들의 그림편지는 1998년 방북 대표단에 의해 전달되었고 북녘 어린이들 역시 답장을 보내주었다. 아직도 그때 받은 그림편지에 담긴 짧은 메시지 속에서 북녘 어린이들의 하루가 어떨지, 친구들과 어떤 놀이를 하며 지낼지 발견해 남녘 어린이들에게 전해주려고 애썼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날 이후, 일터에서 마주하는 현장과 대상들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어린이’, ‘평화’라는 단어는 청소년센터의 어린이 작업장에서 어린이들을 맞이하는 일을 하고있는 지금까지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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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새날을 여는 아이들의 한마당 |
최근에는 어린이들과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팔십 시간 이상을 만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데, 궁리를 시작하는 시간은 늘 설레면서도 조심스럽다. 처음에는 ‘문턱 없도록’, ‘교육적으로 문제없도록’, ‘알차게’ 시작하고 마무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쌓일수록 준비에는 만전을 기하되, 임박해서는 “어린이가 가진 힘을 믿고 신나게 놀 준비를 하자!”는 마음에 기대는 편이 된다. 참여하는 어린이들이 저마다의 탐색의 시간을 보내고 슬슬 발동을 걸면 대체로 이들이 가진 에너지로 술술 풀리기 마련이고, 어쩌다 과열되어 갈등이 생기거나 흥미를 잃는 경우가 포착되면 거기서부터 함께 잘 풀어가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태도는 개인적인 경험 축적에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수많은 현장에서 만난 어린이들의 힘을 믿는 ‘어린이였던 이’들의 눈빛과 태도, 말과 글로 지지받아 강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놀이’나 ‘논다’라는 말을 들으면 저마다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것이 떠오를까? 어린이라면 이 말을 듣자마자 엉덩이가 절로 들썩들썩 ‘밖으로 뛰어 나가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금세 가득 찰 테고, 어른이라면 어린 시절 놀던 즐거웠던 한때가 스르륵 떠오를 것이다.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어린 시절 골목이나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과 ‘비석(비사)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 놀이’ 등을 하다가 어둑어둑해질 때쯤 할머니나 엄마가 부르면 하나둘씩 제 집으로 들어갔던 때가 떠오른다고 한다. 디자인 근사한 놀이기구로 가득 찬 놀이터도 없었고, 주변에서 흔히 주울 수 있는 것이나 언니나 형에게 물려받은 놀잇감으로 몇 시간이고 뛰놀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과 지금 달라진 것은 실컷 놀 시간과 함께 놀 친구가 줄어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놀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채 언저리를 더듬고 있는 ’평화 감수성‘이라는 말만큼이나 ‘놀이’를 이해하고 잘 풀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나의 오랜 숙제이다. 놀이의 정의나 속성을 설명할 때 자유, 상상, 창조, 몰입, 재미, 즐거움, 자발성, 주체성, 상호작용, 탈 일상, 현재, 역할, 규칙 등 다양한 언어로 수식되고 설명되곤 하는데, 내게 한 단어를 골라보라고 하면 “맘껏”이라는 단어를 놀이의 짝꿍으로 세워주고 싶다. 그리고 최근에는 어린이들이 놀 때 그 시간과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가 평화를 만든다”라는 야심찬 명제를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최근 만난 어린이들과의 한 때를 소개해볼까 한다.
어린이 작업장을 운영하면서 두 시간짜리 단 회차 자율작업인 상설워크숍에서는 15분 남짓, 서너 시간씩 10회 이상 운영되는 장기 기획 워크숍에서는 매 회차 작업 시작 전 30분 이내로 관찰과 놀이시간을 갖고 있다. 낯선 공간과 친구들과 함께하며 활동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몸풀기 시간이 필요한데 두리번두리번 관찰의 산책 시간과 신나게 뛰노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안전하게 작업을 하기 위한 몸풀기 체조를 대체한다는 것이 제1 명목이지만, 그날그날 사정이 있어 조금 늦게 오는 친구들을 기다리며 넘치는 호기심과 에너지를 다스리며 마음의 키를 맞추는 시간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조금 덜 바쁜 2월에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어 냉큼 신청을 하고 즐겁게 참여한 교육이 있었다. 어린이어깨동무 사무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녹색연합의 전문기구 녹색교육센터에서 주관한 <환경교육자를 위한 절기+생태놀이 워크숍>이 그것이다. 손종례 작가님과 함께 두 시간씩 세 번의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스무 명이 넘는 열혈 강사들과 함께 몸을 움직이다 보면 시간이 뚝딱 지나가 어느새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되어버리곤 했다.
올해에는 여덟 명의 어린이가 함께하게 된 <모아모아 어린이 연구단>, 전년도보다 한 달 빠른 3월 마지막 주에 첫 만남을 가졌다. 두 번째 만남인 4월 2일, 아직 서먹하고 놀이를 하는 공간도 썰렁한데 어떤 절기놀이가 좋을까 고민이 되었다. 3월 20일은 춘분이고 4월 4일은 청명의 사이인데 어쩐담. 이럴 때는 “어떤 놀이 할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딩동댕!”이지. 춘분놀이, 바람잡기 놀이 당첨! 이례적으로 4월 둘째 주까지 눈이 내리고 추위졌다 풀렸다를 오락가락했던 지난 3-4월의 날씨를 되짚어 봐도, 봄기운으로 꽁꽁 언 얼음이 녹아 맑은 물이 흐르는 청명을 생각해도 적절했던 절기놀이였다고 생각한다.
춘분 절기놀이 '꽃샘바람과 봄바람'
기본 준비물은 봄바람을 상징하는 흰 천과 꽃샘추위를 상징하는 검은 천으로 20X60cm 정도로 뛸 때 잘 나풀거리는 소재면 된다. 여러 가지 소재로 가득 찬 어린이 작업장에서 좀 더 다양한 놀잇감을 준비해 봤다. 알록달록한 자투리 한복감, 배추 망, 비닐과 종이로 된 서너 가지의 완충 소재, 넥타이, 넓은 리본, 안전벨트 끈 등 다양한 재료를 준비했다.
간단한 약속을 통해 순서를 정해 재료를 고를 수 있도록 하고, 소재의 색깔이나 촉감에 따라 찬바람과 따뜻한 바람 팀으로 나누었다. 놀이의 규칙은 간단하다. 봄바람이 꽃샘추위를 잡으면 되고, 잡힌 꽃샘추위는 그 자리에 멈춰 앉는다. 잡아야할 꽃샘추위가 줄어들면 봄바람이 협공해서 더 빨리 꽃샘추위를 잡을 수 있다.
사실 놀이를 준비하면서 천을 잡아당기다가 몸에 감기거나 뛰다가 풀린 신발 끈에 걸려 넘어지면 어쩌나, 거센 바람으로 잿더미가 된 산불을 떠올리며 무서운 바람을 떠올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바람이 되어 신나게 뛰노는 어린이들을 바라보기로 한다. 어떤 소재가 더 나풀거리는지 잡기 어려운지 골똘히 고민하며 재료와 역할을 바꾸어 한두 번 더 놀다 보면 어느새 늦게 온 친구들도 놀이판에 들어와 있다. 서먹한 기운과 몸의 긴장이 풀려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된 상태가 된다. 몸에 묶을 끈이나 고무줄이 있어도 좋지만, 목둘레나 주머니 같은 곳에 3~5cm 정도 끼워 넣어 그 끝이 뛸 때 흔들리도록 해도 좋다고 강사님이 일러주신 대로 하니 오히려 간편하고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숲에 접어들면 나무들로 둘러싸인 햇살이 쏟아지는 둥근 공터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남북의 어린이들이 뛰노는 상상을 덧대어 본다. 땅 위로 솟아났다가 땅 밑으로 다시 자리를 잡은 뿌리둥치도 가볍게 뛰어넘고, 울퉁불퉁한 땅 위에 어느 한 개도 같은 꼴이 없는 돌멩이와 이슬을 살짝 머금은 솔방울도 놀잇감이 되는 자연 놀이터. 바람을 닮은 어린이들이 온몸으로 계절을 느끼며 ‘맘껏’ 뛰노는 그 순간을 사진 속에 담는다면 이 작품의 제목을 ‘평화의 숲’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글줄을 타 내려가다 보니 ‘신체적·정서적·사회적 발달을 돕는다’나 ‘자신의 삶을 탐색하고 자신감을 키우며, 사회성·언어능력·창의력 등 전인 발달을 돕는 중요한 교육수단이다’ 등의 놀이의 효능을 이야기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에너지를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커진다. ‘힘껏’ 놀고 싶고, ‘함께’ 놀고 싶고, ‘계속’ 놀고 싶은 어린이들의 모습이 ‘어린이였던 사람들’의 단단해진 마음 상자의 문을 두드릴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사람들과 자연에서 맘껏 놀고 싶다’는 보드라운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를 기대하게 되는 계절이다.
『놀자 놀자 해랑 놀자』 표지
어린이들을 위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살펴볼 수 있는 사이트
녹색연합 녹색교육센터
환경연합 환경교육센터
사단법인 자연의벗
환경재단 어린이환경센터
국가환경교육 통합플랫폼 초록지팡이(지자체별 환경교육센터 링크)
소개하고 싶은 책/자료
강윤자, 박은하, 손종례, 유종반, 장서윤(그림), 『놀자 놀자 해랑 놀자-놀이로 배우는 24절기의 지혜』, 목수책방 2020
황경택, 『주머니 속 자연놀이 100』, 황소걸음 2017
붉나무, 『열두 달 자연놀이-우리 동네에서 찾은 자연놀이 365가지』, 보리 2008
2024년 와숲이지 <계절별 숲 활동 아카이빙 자료집> 녹색교육센터 주관, 아름다운 가게 지원 2024.12
<계절별 숲 활동 아카이빙 자료집> 바로가기
임수연 | 이십 대에는 어린이어깨동무에서 평화교육을, 삼십 대에는 환경단체에서 환경교육과 국제협력을 고민하며 살아가다가 사십 대에는 청소년센터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2022년부터는 ‘어제의 쓰레기가 오늘의 소재가 되는 실험실’ 어린이 작업장 모아모아랩을 기반으로 7세~13세 어린이들이 놀이와 작업을 맘껏 해낼 수 있도록 판을 짜고 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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